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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아카데미

창조적 진화는 잠시 중단합니다.

2009.03.17 0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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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선 오늘 일년간 끌어왔던 창조적 진화강독을 일단락 짖는 걸로 구성원들끼리 합의를 했습니다. 책은 다 읽지 못했지만, 구성원 스스로가 베르그송의 읽는데 일정한 한계에 닿음을 느꼈고 이런 식으로 더 읽어 나가는 건 무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에 창조적 휴식기간을 가지기로 했습니다. 박홍규 선생이 말했다 시피 베르그송은 불과 30세에 당시 유럽의 지성사적 성과들을 전부 아우르면서 자신의 형이상학적 결과물인 “시론”을 쓴 진정 한 천재였습니다. 창조적 진화만 하더라도 그런 형이상학적 결과의 생명으로의 확장이기 때문에 과학적 식견도 있어야 할 뿐 아니라 서구 존재론사(특히 플라톤과 아리스토틀 중심으로)를 어느 정도 알고 있어야 나름 베르그송의 논의가 의미를 더했을 텐데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베르그송은 우리가 가진 시간과 노력이상의 것을 요구했기 때문입니다. 개인적으로도 읽으면 읽을수록 점점 어려워지는 내용을 대하면서 이거 보통 공사가 아니구나. 라는 낭패감에 빠질 때가 한 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베르그송을 통해 좋은 것, 즉 새로운 시야가 조금씩 열리는 경험을 하면서 이것을 버릴 수도 없는 노릇이어서 이것은 향후 4-5년의 작업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내 머릿속에는 영어단어들도 꽤 유영하고 다니지만 존재론의 귀퉁이들도 조금씩 떠돌고 있습니다. 과연 우리가 “있다”라고 하는 것과 “없다”라고 하는 것은 뭘까? 이것은 존재와 무로 말할 수 있을 텐데, 창조적 진화에서 베르그송은 이 질문에 대한 흥미로운 대답을 하고 있습니다. “무”는 없다, 즉 “없는 것”은 없다. 우리는 단지 우리가 관심 가지는 대상이 그 자리에 없음에 대한 실망을 그 말로 표현하고 있다고 말합니다. 베르그송에게는 천지에 “있는 것”뿐이 없습니다(?). 이러한 사유는 그 이후 유럽의 지성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을 것입니다. 이유는 모르지만 우리는 부지불식간에 “무”를 상정하고 경거망동합니다. “원주사회에는 사회체제라 부르는 것이 ‘없어’라는 편견을 가지고 유럽인들은 얼마나 원주민사회를 파괴했는가? 미국문학으로 분류되는 초기 청착기에 있었던 기록물들에서 혹은 지금도 유럽인들은 그 아메리카 땅을 불모지로 보고 그 풍요를 파괴했던가? 우리는 또 그들을 얼마나 닮았던지 어쩌면 질서와 풍요로 가득한 곳을 “불모지”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기면서 얼마나 파괴하고 있는가? 우리가 일상에서, 즉 일상적 시공간적 약속에서 쓰는 있음과 없음(있음과 없음도 많은 다른 내용이 있다. 그러나 일상적 쓰임에서는 이런 것을 기본적으로 무시하기 때문에 이야기를 잘 하지 않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이라는 것은 또한 일정한 맥락 안에서 놀아야 하는데 얼마나 주제넘게 확장하면서 타자의 세계를 비웃는가? 이런 것들이 베르그송이 인도한 존재론의 입구 선 제 머릿속에 맴도는 착잡한 상념들입니다. 언젠가 정리되는 대로 우리는 다시 베르그송을 찾을 것이고 다시 절망할 는 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괜히 여기까지 따라왔다는 실망은 하지 않을 것임은 분명하기에 빠른 시일 내에 다시 강독모임이 재계될 것입니다. 모두 건승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