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nd in Life 일곱 번째 모임은 11월 11일 목요일 저녁 7시~
2010.11.03 23:48
겸연쩍게 맨 입으로 엉덩이 디밀고 앉았다가
해피쏭님과 자연님에게 쏠쏠이 공부 이야기 얻어듣고 돌아오길 벌써 여섯 번이나 했고,
11월에 접어들어서는 일곱 번째 모임을 하게 되네요.
목요일이 여러 모로 괜찮아서 지난 모임에 이어 계속 목요일에 하게 될 것 같습니다.
녹색문명공부모임이 있는 주 목요일 11월 11일에 합니다.
길담서원에서 7시에 만나고요,
Mind in Life 제6장 이야기를 더 나누고요,
조금 더 되면 7장까지도 넘봐보게 될 것 같습니다.
10월 28일 모임에는
자연, 해피쏭, 시인처럼, 눈사람과 보현씨,
이렇게 다섯 사람이 모여서 귀 쫑긋 세우고
자연님과 해피쏭님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6장에서는 톰슨이
칸트의 이야기에서 물질에 대한 이해와 생명에 대한 이해를 연결지을 수 있는 발상을 찾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주로 하고 있다는 것 같지요?
어떻게 보면 목적론을 들여오지 않고도 물질에 대한 이해로 생명을 이해할 수 있고 있어야 한다 볼 수도 있고,
어떻게 보면 목적론 없이는 생명을 이해할 수 없다고 볼 수도 있어 두 입장이 배치되는 것 같지만
칸트 이래 베르그손이니 누구니 여러 학자가 이 문제를 탐구하고 해결해왔다네요. (맞나? ^^;;)
어쨌거나 톰슨은 칸트가 물질에 대한 이해와 생명에 대한 이해를 통합하려 애썼고
현재에 와서 '자체생성'에 관한 이론을 통해 그것이 실현될 수 있다고 쓰고 있답니다..
(들은 이야기를 옮기다 보니 자신이 없네요... 빨리 시간 내서 읽어야 할 것인디...)
얼렁 해피쏭님이 정리를 해주셔야겠습니다요.
28일엔 9시 정도 모임 정리하고
재영형 연구실 짐 정리 도와준다는 핑계로 이대까지 따라가서
보쌈에 소주 곁들여 늦은 저녁 겸 뒷풀이도 했네요.
보현씨가 모임에 오니 모임이고 뒷풀이고 한결 재밌어지네요.
그럼, 11일에 또 모여서 이야기 많이 나눠보자고요.
-시인처럼
안녕하세요.
몇 차례 밀린 공부모임후기를 써볼까 합니다.
항상 읽고 정리하는 일이 급급해서
후기를 쓸 여유가 없었는데
이번 모임 때 7장을 못했기 때문에
(저는 다 했습니다요~ 후후훗~)
한결 여유롭게
중간중간 문득문득 떠올랐던 논점(?)들을 명확히 해볼까 합니다.
기계와 생명체 (저는 여기서 시작하는게 편하더라구요)
일단 지난 작은 토론회에서 오솔길님이 “기계는 인간이 보생명의 계기가 되어 탄생한 낱생명으로 볼 수 있다”라는 취지의 말씀을 하셨죠. 그것은 기계와 생명체를 구분하는 결정적인 기준은 없다는 것이죠. 마찬가지로 물질에서 생명을 구분하는 기준도 여기서부터다라고 획일적으로 정할 수 없지 않겠느냐 하는 것이죠.
톰슨은 생명체와 기계를 구분하는 태도를 취하죠.
일단 생명체라면 autopoiesis 해야 하죠. 근데 이것에 대해 오솔길님이 abac모형을 제시하면서 이것은 autopoiesis가 아닌가? 문제를 제기하셨는데 ….. è 일단 마투라나를 비롯한 학자들이 말하는 autopoiesis가 단순히 자체촉매질서의 물질을 의미하지는 않는다는 것은 명백하더라구요 (카우프만의 예, 복제분자의 예 ). 이러한 불일치는 오솔길님이 생명체의 boundary와 분자물질의 boundary의 구별을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지만 저도 정확한 지식이 없어서 모르겠네요. 하여튼 그 막(생명체의 탄생을 가능하게 한 막)이 그 막 (분자를 한 개, 두 개 가르는 경계)이 아니라는 것은 명백한 것 같아요.
è 그래서 제 생각에는 autopoiesis학자라면 별 딜레마 없이 오솔길님의 abac 모형에 대해 생명체가 아니라고 결론을 내릴 것 같은데요. 그렇다면 대립은 물질과 생명체의 질적 차이를 인정할 것인가? 하는 것인데
(1) autopoiesis이론에 따르면 질적 차이를 인정한다
생각해 볼 수 있는 질문은 무엇을 보고 질적 차이라고 하는가?
과학적으로 autopoieis - structural determinism (operational closure) 이라 할테고
현상학적으로 self의 탄생 - idnetity와 sensemaking 이라고 할 것입니다.
이에 대한 비판으로 오솔길님은 이렇게 적고 계시네요.( 작은 토론회 발표문 5쪽)
(i) 여전히 외부의 도움이 결정적이다.
(ii) 개체 안에 무엇이 있다는 막연한 기대이다.
(i) à 무엇이 무엇이라고 결정하는 것에 대해 더 생각해야 할 일이지만 여기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으로는 다음과 같은 것입니다. 온생명론도 온생명에 한해서는 물질과 구분되는 것으로 결정을 한 것이라면 그 결정하는 기준으로 열역학법칙을 사용하신 것인가요? 생명을 autopoiesis로 정의할 때 결정적인 기준은 당연히 열역학법칙은 아니라 membrane 과 operational closure 인데요. 그렇다면 (ii) à membrane 과 operational closure 은 막연한 것인가? 보는 사람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평가할 수 있는 것인가? 그것은 과학적인 것이 아닌가? 이런 것에 대해서 더 생각해 봐야죠.
(2) 온생명론에 따르면 질적 차이를 인정할 수 없다
그렇다면 제게 떠오르는 질문은
(i) 낱생명만 질적 차이를 인정할 수 없고 온생명은 질적 차이를 인정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면 생명의 단위가 어떻든 물질과 생명의 질적 차이를 인정할 수 없다는 것인지
(ii) 질적 차이를 가르는 기준이 물질법칙으로 설명이 가능한가 인가요?
è 살짝 지치니까 얼렁 마무리 짓고 퇴장해야겠습니다.
결국은 과학관의 차이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여러분은
현상학 대 과학이라고 생각하세요? 현상학 속의 과학이라고 생각하세요?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6장 유기체의 철학 부분 파일첨부요.
(이름대문자 안했고, 오타 안고쳤고, 순서를 매기는 일관성있는 방법은 전혀 없습니다 --; )
* 7장부터는 프린트해갈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