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괴의 다섯 단계 - 드미트리 오를로프
2013.06.12 10:33
(그림 출처: http://cluborlov.blogspot.kr/ )
석유정점론을 비롯하여 많은 사람들이 문명의 붕괴를 우려합니다.
드미트리 오를로프의 새 책 [붕괴의 다섯 단계](Five Stages of Collapse)은 이런 논의를 정리해 주는 동시에 다가올 붕괴를 경고하고 이를 대비하는 방법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이 책의 부제가 "살아남은 (또는 살아남을) 사람들을 위한 도구상자"라는 것이 이를 잘 말해 줍니다.
여러 서평에 따르면 오를로프의 생각은 비관론보다는 낙관론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러시아 출신으로 12살에 미국으로 이민을 간 엔지니어로서 미리 대비를 잘 하면 엄청난 붕괴를 막을 수 있다는 쪽으로 이야기를 끌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이기도 합니다.
이 책이 '붕괴'를 말하기 위해 1972년에 출판된 [성장의 한계](Limits to Growth)를 언급하는 것이 흥미롭습니다. 로마클럽보고서에서는 비교적 단순한 성장 모형을 만들어서 시뮬레이션을 시켰습니다. World3이라는 이 프로그램(시나리오)은 세계 인구, 산업화, 오염, 식량 생산, 자원 고갈이라는 다섯 가지 요인만을 가지고 미래 사회를 예견하려 했는데, 2004년에 출판된 [성장의 한계, 그 후 30년](Limits to Growth: The 30-Year Update)에 따르면, 이 모형이 놀랍게도 지난 30년 동안을 잘 예측했다고 오를로프는 지적합니다.
그 뒤의 10년을 아주 잘 예측하고 있는 것이 이탈리아 피렌체 대학의 우고 바르디(Ugo Bardi)가 제안한 소위 세네카 낭떠러지 모형(Seneca Cliff model)이라고 합니다.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Lucius Anneaus Seneca)가 했다느 말에서 따 온 이름이랍니다.
“만사가 생겨나는 속도와 비슷하게 소멸된다면 우리 자신과 우리의 성과가 지니는 허약함에 어느 정도 위로가 될 걸세. 하지만 그게 그렇지가 않다네. 생겨나는 것은 정말 느려터지지만, 망하는 것은 순식간이거든."
석유정점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허버트 곡선(종 모양 곡선)은 정규분포(가우스 분포)이고, 정점을 기준으로 좌우대칭이죠. 그러나 바르디가 자원과 자본이라는 변수에다 오염이라는 변수를 덧붙이고 나니 이 종 모양 곡선이 한쪽으로 찌그러진 모양이 되었다는 겁니다. 성장을 향하는 쪽은 완만하지만, 정점을 지난 뒤에는 급격하게 하락해 버리는 모양이죠.
오를로프가 말하는 붕괴의 다섯 단계는 신뢰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 재정적 붕괴(financial collapse): "평소와 같은 사업"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단계. 미래의 모습이 과거와 마찬가지일 거라는 믿음이 무너지고, 재정적 자산을 보장할 수 없으며, 금융기관은 갈수록 악화되는 단계.
- 상업적 붕괴(commercial collapse): 시장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는 단계. 화폐가치는 갈수록 하락하고, 상품의 확보가 점점 어려워지고, 수출입의 연쇄가 끊어지고, 생활필수품의 품귀가 일어나는 단계.
- 정치적 붕괴(political collapse): 정부가 보살펴 주리라는 믿음이 무너지는 단계. 생활필수품 등에 대한 접근이 어려워지면서 정부가 권위를 잃고 실제적인 역할을 할 수 없는 단계.
- 사회적 붕괴(social collapse): 다른 사람들이 보살펴 주리라는 믿음이 무너지는 단계. 여러 사회집단 사이에 갈등이 깊어지고 사회적 제도들이 무너지는 단계.
- 문화적 붕괴(cultural collapse): 인간의 덕에 대한 신뢰가 송두리째 무너지는 단계. “친절, 관대. 배려, 돌봄, 정직, 환대, 공감. 자애” 등의 가치가 사라지고, 가족끼리도 부족한 자원을 위해 서로 경쟁하는 단계.
이 다섯 단계의 붕괴가 막연한 미래의 일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오를로프는 재정적 붕괴의 여러 측면들을 상세하게 다룬 뒤에, 실제 사례로 아이슬란드의 경우를 보여줍니다. 상업적 붕괴의 실제 사례로 러시아 마피아의 경우를, 정치적 붕괴의 사례로 아프가니스탄의 한 지역을, 사회적 붕괴의 사례로 집시를, 문화적 붕괴의 사례로 동아프리카의 "이크"라는 부족의 경우를 상세하게 보여줍니다.
최근 북아프리카에서 일어난 일련의 사태나 그리스 상황을 염두에 두면, 이런 붕괴에 대한 이야기가 막연한 비관주의자들의 문제만은 아닐 것 같습니다. 석유정점론이나 지구온난화, 기후변화 등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우려하는 것이 되어 있지만, 생각보다 붕괴가 가까이에 있는 것은 아닐까 한번 곱씹어볼만한 것 같습니다. 총체적인 붕괴는 아니라 해도 1단계 재정적 붕괴에 해당하는 외환위기 때 수 많은 사람들이 거리로 나앉고 스스로 생명을 끊기도 하고 직업이 바뀌고 사회제도가 큰 변화를 겪었던 것을 보면, 이런 우려가 눈앞의 일인 것 같기도 합니다.
다만 제 자신은 사회과학의 폭넓은 배경을 깔고 있지 않은 자연과학자나 공학자의 분석을 그리 신뢰하지 않는 편이라, 이 책은 어떨지 궁금하기도 합니다. 가령 저는 자레드 다이아몬드 식의 논의는 영 공감이 가지 않았었는데, 오를로프의 이야기는 어떨지 한번 차분하게 따라가볼만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우선 짧게 이 책에 대해 저자 자신이 소개하는 내용을 한번 훑어보시면 더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http://cluborlov.blogspot.kr/p/the-five-stages-of-collapse.html
댓글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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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6.16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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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6.18 12:50
오를로프의 문장은 특이합니다. 약간 관조하듯이 떨어져서 농담 조로 말장난도 섞어 가면서 이야기를 펼치는 스타일인 모양입니다. 그래서 다루고 있는 주제가 상당히 무거운데도 읽어나가는 재미가 좀 있습니다. 이 책에 대한 출판사의 소개에서는 오를로프가 기존의 붕괴론자들보다는 더 낙관적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3단계 정도까지 가는 것은 생각보다 빠를 수 있지만, 거기에 적절하게 대응을 잘 하면 4단계나 5단계로 진입하지 않을 수 있다는 식입니다.
동아프리카의 '이크' 부족은 위키피디어( http://en.wikipedia.org/wiki/Ik_people )에서도 볼 수 있는데, 케냐 접경 우간다 북서쪽에 사는 산악 부족으로 현재 남아 있는 인구가 1만여명 남짓한 모양입니다. 키데포 계곡 국립공원을 만들면서 원래 살던 곳에서 쫓겨나서 산으로 옮겨갔는데, 테인터도 "복잡한 사회들의 붕괴"에서 이크 족을 짧게 언급합니다. 극심한 가뭄과 기근 때문에 사실상 사회적 조직이 완전히 깨져서 음식을 구하는 일도 혼자 하고 옆에서 다른 사람이 굶어 죽어가고 있더라도 돕지 않는다고 쓰고 있습니다. 아이들도 3살까지는 최소한으로 돌보지만 3살이 되면 스스로 먹을 것을 찾아 나서야 한다고 되어 있습니다.
이런 이야기는 1972년에 출판된 Colin Turnbul의 책 The Mountain People에 나오는데, 유럽 관광객을 위해 조성된 국립공원 때문에 전통적인 사냥터를 잃어버린 부족이 원래의 협동심 많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풍습을 완전히 잃어버리고 가장 이기적이고 잔인한 사람들로 바뀐 모습을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심지어 굶어 죽어가는 아이들을 미끼로 해서 사냥을 하는 모습까지 그리고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턴불의 연구와 저작에 대한 비판도 있습니다. 턴불 자신은 이크 족 언어와 문화에 대해 제한된 지식만을 가지고 있고, 턴불의 기술과 달리 이크 족은 오래 전부터 사냥이 아니라 농경으로 살아온 부족이라는 겁니다.
오를로프의 서술은 모두 턴불의 책만을 바탕으로 하고 있어서 사례연구로서는 부족함이 많아 보입니다만, 턴불이 서술한 이크 부족의 생활이 오를로프가 말하는 5단계 문화적 붕괴에 해당한다는 것은 잘 보여주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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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2013.06.18 14:59
오.. 재밌네요~ 이렇게 읽어가면서 계속 올려주시는 건가요? ^^
너무 재밌는! 저처럼 난독증에 읽기가 느린 사람한텐 엄청난 동기&관심 부여가 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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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6.18 16:51
재미있다니 다행입니다. 5단계 문화적 붕괴는 정말 총체적 붕괴인 것 같습니다. 믿을 사람이나 믿을 것이 정말 아무 것도 없는... 사실 5단계는 어찌 보면 영화 The Day After Tomorrow나 여러 재난 영화에서 종종 묘사되는 상황이라 그리 낯설지도 않은 것 같습니다.
2장에는 제가 예전에 한번 소개해 드린 적이 있는 모스의 "선물의 경제"(economy of gift) 이야기도 나와서 반갑더군요. 이전에 박인구님의 발표와 소개로 칼 폴라니의 사상을 상세하게 배운 기억이 새록새록 납니다. 그 때 박인구님이 폴라니가 "거대한 전환" 이외에도 바로 고대 사회의 경제 구조를 면밀하게 연구했다는 점을 알려 주셨죠.
3장에는 19세기 러시아의 유명한 무정부주의자 표트르 크로포트킨도 등장합니다. 아무래도 정치적 붕괴를 말하기 위해서는 무정부주의와 무정부 상태를 말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기도 합니다.
3장에는 흥미로운 문장도 눈에 띕니다. 살아 있는 생명체와 도시를 비교하는 것인데, 생명체를 "무정부적으로 조직화되어 있다"고 말하는 것이 독특합니다.
The difference between a living organism and a city is that while a living organism is organized anarchically, a city is organized hierarchically. A living organism is a sustainable, egalitarian community of cooperating cells that uses the economies of scale of a larger size to move more slowly and to live longer. A city is organized into various classes, some more privileged than others, and is controlled through formal systems of governance based on written law and explicit chains of comm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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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6.20 12:54
어제 제레드 다이아먼드의 책 "문명의 붕괴"가 도착했습니다.
예상은 했지만 780쪽이 넘는 뚱뚱한 책이어서 부담이 많이 되더군요.
2장부터 9장까지 이스터, 핏케언, 헨더슨, 아나사지, 마야, 바이킹, 노르웨이 그린란드 등 과거의 모습을 보여준 뒤, 10장부터는 르완다, 도미니카 공화국, 아이티, 중국, 호주의 위기를 다루고 있습니다. 14장의 제목이 "마지막 나무를 베었던 사람은 무슨 생각을 했을까?"인데 영어 원문은 "Why Do Some Societies Make Disastrous Decisions?"인데 역자가 재치 있게 번역한 것 같습니다. 쉽게 짐작할 수 있는 것은 다이아먼드가 환경문제를 매우 중요한 요인으로 보고 있다는 점입니다. 서평들에 따르면 이 점에서 다이아먼드와 테인터는 관점과 접근방식이 다른 것 같습니다. 오를로프는 다시 이 두 사람과 또 다를 터이구요. 대략의 느낌은 오를로프는 다이아먼드보다는 테인터에 가까운 것 같습니다.
사실은 이 책에 대한 내용을 적고 있다가 실수로 백스페이스 키를 눌렀더니 한 화면 뒤로 가면서 한참 쓴 내용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ㅠㅠ 시간을 버렸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가 이 또한 깨달음의 계기가 될 수 있겠다 싶기도 합니다. 하여튼 힘을 내서 다시 댓글을 작성하고 있습니다. ^^
다이아먼드의 책도 pdf 파일로 받을 수 있습니다. (http://www.barberb.net/twilight/Jared Diamond - Collapse.pdf)
테인터의 책은 여기 있습니다. (http://monoskop.org/File:Tainter_Joseph_The_Collapse_of_Complex_Societies.pdf )
다이아먼드와 테인터의 강연 영상이 있는데 짧게만 들어보았지만, 시간이 허락하는 대로 다시 가서 들어보려고 합니다.
테인터의 강연은 2010 International Conference on Sustainability: Energy, Economy, and Environment에서 진행된 것인데 물리학 배경인 저로서는 테인터의 "복잡한 사회" 개념이 익숙한 것이어서 더 흥미로웠습니다.
Jared Diamond - How Societies Fail-And Sometimes Succeed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 by Dr. Joseph Tainter
Dmitry Orlov, the collapse (From the Green Life Eco Fest - March 22,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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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2013.06.24 10:03
예전에 다이아몬드의 책, 도서관에서 빌려 읽다가 지쳐서 다 못읽고 그냥 반납한 적이 있는데, 이번에 또 빌렸습니다. 지금 보니 그새 더 두꺼워진 느낌.. ^^; 4부 지구의 미래를 위하여만 어떻게 읽어볼까 싶기도 하네요.
원문이랑 강연 영상 잘 볼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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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6.25 18:52
다이아먼드의 TED 강연이 20분이 채 안 되는데, 요약을 잘 해 주고 있습니다.
http://www.ted.com/talks/jared_diamond_on_why_societies_collapse.html
특히 좋은 점은 한글 자막이 있다는 거죠. TED가 갈수록 유명해지는 건지 몰라도 한국어 번역도 나름 훌륭한 것 같아요. 옆에 보니 "임보영"이란 분이 한국어로 번역하고 JS Park가 감수했다는 말도 있네요.
위의 테인터 강연 링크는 1시간 반동안 계속된 강연과 질의 응답이라 좀 지루합니다. 아래 링크는 3분짜리 요약본입니다. ^^
Joseph tainter; The Collapse of complex Civilisation
2010 International Conference on Sustainability: Energy, Economy, and Environment의 초청강연 셋이 다 흥미롭습니다. 질의 응답 시간도 재미있습니다.
Collapse of Complex Societies by Dr. Joseph Tainter
The Modern Economy, Civilisation, Complexity & Collapse - David Korowicz
Nicole Foss aka Stoneleigh - A Century of Challenges - Peak Oil & Economic Crisis
Nicole Foss - How I Prepared My Home for Peak Oil and Economic Uncertainty
위에 올려 놓은 강연 동영상 링크는 2011년 Sustainable Conference의 초청강연입니다. 초청연사는 Joseph Tainter, Nicole Foss, David Korowicz입니다. 테인터는 인류학자이고, 코로위츠는 물리학자+인간계생태학자라고 소개되어 있네요. 특히 Nicole Foss라는 분의 강연이 아주 흥미롭습니다. 2011년 지속가능성 학술대회 초청강연은 좀 지루한데, 2011년 초청강연은 훨씬 생기가 있습니다. 소개란을 보면 "Nicole M. Foss is co-editor of The Automatic Earth, where she writes under the name Stoneleigh. She and her writing partner have been chronicling and interpreting the on-going credit crunch as the most pressing aspect of our current multi-faceted predicament. The site integrates finance, energy, environment, psychology, population and real politik in order to explain why we find ourselves in a state of crisis and what we can do about it."이란 말이 나옵니다. 생물학 전공이면서, 대기수질 오염 전공으로 학위를 했고, 법대에서 개발국제법을 공부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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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6.30 17:48
어제 종이 책도 도착했습니다. 확실히 책을 읽기에는 종이 책이 좋은 것 같습니다. 주문하고 열흘 정도 걸렸습니다. 한 주 정도 빨리 도착했습니다. 로컬 푸드 이야기하면서 음식이 석유를 먹는 이야기를 했었는데, 저처럼 책 가지고 사는 사람에게는 책을 사는 것도 석유를 먹는 일이 되겠네요. 그렇게 보면... 전자 책이 화석연료를 더 적게 소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전기를 써야 하니 그만큼 핵발전을 부추기는 면도 있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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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7.06 15:45
이 책 읽기가 녹록치가 않습니다. 경제나 정치 관련 용어들도 익숙하지 않네요. 킨들 전자책을 사서 읽다 보니 페이지가 헷갈려서 요약문 쓰다 보니 1장을 침범했습니다. 사례를 먼저 보는 게 더 재미있을 것 같아서 (정확히는 더 이해가 나을 것 같아서) 사례부터 봤는데, 읽다 보니 아이슬란드의 사례가 제가 맡은 2장이 아니라 1장이더군요. ㅠㅠ 그냥 버리기는 아까워서 여기 일부를 올려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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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의 사례
2008년 아이슬란드의 경제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은행 셋(Kaupthing, Glitnir, Landbanki)이 파산선고를 하면서 심각한 재정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국제통화기금(IMF, International Monetary Fund)의 긴급구제금융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물가가 18% 이상 뛰었고 환율은 50%로 악화되었다. 2008년에 아이슬란드의 주요 은행 셋의 부채는 610억 달러가 넘었다. 이는 아이슬란드 전체 GDP의 12배였다. 재정적으로 가장 취약한 나라는 일본과 미국이다. 그 다음으로 그리스, 아일랜드, 스페인, 포르투갈이 있다. 아이슬란드는 인구 32만 명의 아주 작은 나라이다. 다른 나라들에게서는 “무엇이 잘못 되었는가?”라고 질문하는 게 자연스럽지만, 아이슬란드의 경우는 “무엇이 제대로 되었는가?”라고 묻는 게 낫다.
아이슬란드의 재정 위기는 좀 달랐다. 영국의 브라운(Gordon Brown) 총리가 테러리즘과의 전쟁을 선포하면서 아이슬란드의 은행들이 알카에다와 탈리반의 자금줄이라고 언급하면서 문제가 시작되었다. 이 세 은행은 해외의 부채들을 갚아야 했다. 그 다음에 논쟁이 시작되었다. 해외에서 활동하는 사설 은행의 채무를 국민의 세금으로 갚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였다. 2010년 2월 아이슬란드 의회는 영국과 네덜란드에 35억 달러의 빚을 세금으로부터 갚는 법안을 통과시켰는데, 대통령 그림손(Ólafur Ragnar Grímsson)은 거부권을 행사했다. 3월의 국민투표에서 90%가 그림손을 지지했다.
그림손의 생각은 분명했다. “영국과 네덜란드의 주장은 유럽금융체제가 사설은행과 같이 굴러가야 한다는 것이다. 은행이 수익을 내면 은행 자산가들이 부유해진다. 그러나 은행이 파산하면 그 피해는 모든 국민에게 돌아간다. 국민의 혈세로 이를 갚아 주어야 한다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림손이 보기에 “은행의 파산은 재정적/경제적 위기일 뿐 아니라 정치적, 사회적, 법적 위기”였다. 유럽연합의 여러 대표자들뿐 아니라 아이슬란드 국내의 재정적 기관들 모두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그림손은 용기 있는 행동을 했다. 심지어 의회도 국민을 대표하는 역할을 잊어버렸다. 이들의 재정기반을 마련해 주고 살아가게 하는 사람들이 바로 자산가였기 때문이었다.
대표 민주주의가 이런 상황에 빠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영국식 민주주의가 그렇다.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정해진 것이 사람들의 생활을 곤궁에 빠뜨린다. 심지어 이런 상황에서는 군부쿠데타마져 합리화된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독재를 겪었고 그리스는 군부가 쿠데타를 통해 집권했다. 아일랜드는 500년 넘는 영국의 식민지 지배를 통해 영국식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 아이슬란드와 달리 아일랜드는 은행 비리의 국정조사를 묻는 2011년 국민투표에서 은행의 실패를 국민이 갚아야 한다는 편에 손을 들어 주었다.
아이슬란드가 이렇게 할 수 있었던 힘은 어디에 있을까? 9세기에 아이슬란드에 정착하여 Alƥingi를 세웠던 Norse는 적은 인구를 토대로 직접 민주주의의 전통을 발전시켜왔다. 스위스도 비슷하다. 8백만 명의 인구가 26개의 칸톤으로 나뉘어 있고, 어느 한 칸톤이 다른 칸톤을 지배할 수 없다. 너무 커지면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힘들기 때문에 더 작게 나뉘려는 흐름이 있다. 스페인으로부터 독립하려는 카탈로니아가 그런 예이다. 유럽 연합 전체의 관점에서 보면 독일의 통일을 후회하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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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2013.07.08 11:35
계속 올려주시는데, 저도 부응하는 뭔가를 내놔야할 것같은 의무감이 느껴지네요. 닥치면 하려고 미뤄뒀는데, 벌써 이번 토요일이 모임날. 그래서 오늘부터 시작하려고 합니다. 제 기준으로 보면 아직 닥치진 않았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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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자연자연님이 엄청난 열정을 보여주셔서 마음의 압박이 심하긴 하지만 여건이 허락치 않아 저는 귀동냥만 하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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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7.08 15:06
열정이라고 하니 부끄럽습니다. 여러 일이 겹치는 바람에 몇 주 전에 마음먹었던 것처럼 할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제가 맡은 2장만 간신히 읽었는데, 정리하기에 시간이 꽤 듭니다. 하지만 "아무리 바빠도 바늘 허리 매 쓸 수 없다"는 속담이 떠오릅니다. 돌이켜 보면 이런 상당한 책을 한 달만에 끝내려고 생각했던 것 자체가 좀 무리가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이번 모임에서는 몇 가지 중요한 점들만 짚어보고 시사점을 얻는 것이 현명해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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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3.07.08 15:25
선물의 경제와 관련된 글을 링크해 둡니다. 선물의 경제(학)
오를로프가 대안으로 제시하는 중요한 개념 중 하나가 바로 선물의 경제입니다. 물물교환이나 시장이 아닌 선물을 통한 관계를 강조합니다.
한국어판은 한길사에서 2002년에 출판되었는데, 2010년판이 5쇄입니다. ^^
조르주 바타이유, 클로드 레비-스트로스, 자크 데리다 등 여러 사람이 마르셀 모스의 '증여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The_Gift_(book)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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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사람
2013.07.11 18:29
잘 돼 가시나요? 어렵네요.. ^^; 저는 문화적 붕괴 맡았는데, 난데없이 언어 얘기가 나오면서 단어도 어렵고 정신없네요. 재미는 좀 있지만, 어려워서 재미가 반감되고 있습니다. 하하...
오를로프의 '붕괴론'은 자연스럽게 2005년에 미국의 지리학자 자레드 다이아몬드가 [총, 균, 쇠]의 후속편으로 낸 [문명의 붕괴](Collapse: How Socieities Choose to Fail or Succeed)를 떠 올리게 합니다. 1988년에 출판된 미국의 인류학자 조지프 테인터의 [문명의 붕괴](Collapse of Complex Societies)가 경제적인 요인에 주목했다면, 다이아몬드는 환경 문제에 집중합니다. 그렇다면 오를로프는 어떨까요?
이 질문은 이메일로 눈사람님이 저에게 했던 질문이랍니다. ^^ 바로 답을 할 수 없었죠. 제 공부가 많이 부족하니까요. 아마 다음 달 모임에서 가장 중심에 놓이게 될 질문이 이것이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