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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아카데미

온생명에 대한 단상

2010.01.14 16:55

타임헌터 조회 수:4989

 

장회익 교수님의 『물질․생명․인간』에 대한 한자경 교수님의 논평을 읽어본 후 <온생명>이라는 개념을 간단히 살펴보았습니다.

 

 

한교수님은 <온생명>과 <낱생명> 사이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이러한 질문은 첫째로 “<온생명>이란 비유인가?”라는 의문에서 비롯된다고 봅니다. 그리고 둘째로 <낱생명>과 <낱생명> 사이의 관계에 대한 질문을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들째 질문은 <온생명>이 <낱생명>의 GCM(최대공약수)인가 아니면 LCM(최소공배수)인가 라는 의미는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먼저 <온생명>이라는 개념이 비유에 불과한 것이라면 구체적인 분석의 대상이 아니므로 나름대로 이해하고 넘어가면 그만입니다. 그러나 <온생명>이라는 개념이 비유가 아니라 모형이라면 그것은 분석이 가능해집니다. 즉 이 모형은 무엇을 대상으로 하며 어떤 구조를 갖는가 하는 질문이 당연히 뒤따르게 됩니다.


이와 관련하여 한교수님은 세 가지 모형을 제시합니다.

(1) {<온생명> vs <낱생명>} = {(전체) vs (부분)}

(2) {<온생명> vs <낱생명>} = {(근원) vs (현상)}

(3) {<온생명> vs <낱생명>} = {(성체) vs (종자)}

 

 

이어서 한교수님은 “개체적 물질에서 생겨난 생명은 결국 낱생명이고 ……”라고 하면서 “온생명이 가능하려면 생명이 개체적 물질에서 비로소 생겨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개체적 물질 이전에 전체적인 하나의 생명에너지가 존재해야 하는 것 아닐까?”라고 질문합니다. 역시 <온생명>이라는 개념의 본질에 대한 제안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교수님의 생각은 GCM으로서의 <온생명>보다는 LCM으로서의 <온생명>을 염두에 두고 있으며 나아가서는 (3)의 제안을 강하게 지지하는 듯 보입니다.

 

 

(1)에서의 <낱생명>은, ‘코끼리’와 ‘코’의 예에서 보듯이, 서로 다른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에서의 <낱생명>은, ‘나무’와 ‘나뭇잎’의 예에서 보듯이, 서로 같은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1)의 제안은 GCM으로서의 <온생명>을 의미하고 (2)의 제안은 LCM으로서의 <온생명>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3)의 제안은 부분이 전체와 동형의 관계인 ‘FRACTAL’이라는 개념을 연상시킵니다. 특히 이 모형은 시간이 중요한 축으로 개입하는 모형이라서 (1)이나 (2)와 같은 기반에서 이해하기가 쉽지 않아 보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모형들의 제시는 장교수님의 설명중 제한된 인식의 틀에 비친 <온생명>의 모습이 마치 개구리의 눈에 비친 나뭇잎과도 같은 것이라는 비유에서 비롯된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렇다면 (1)의 제안에서 코끼리의 ‘코’는 이른바 <낱생명>이 아닙니다. 그리고 (2)의 제안에서 ‘나뭇잎’ 또한 <낱생명>이 아닙니다. <낱생명>은 일단 일상적 개념에서 우리가 ‘생명’이라고 부르는 것과 일치해야 한다고 장교수님은 주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온생명>에는 두 가지 개념이 합성되어 있습니다. “온”과 “생명”입니다. 따라서 <온생명>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생명”이라는 개념이 <낱생명>을 통해 이해되고 난 후 “온”이라는 개념이 이들 사이의 관계를 통해 이해되어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러한 방식으로 ‘생명’도 이해할 수 있을까? 당연히 ‘생명현상’도 그 바탕에 ‘물질현상’을 깔고 있으므로, 원칙적으로, 이해되어야 함이 마땅하다. 그리고 생명체 내부에서 발생하는 그 어떤 현상도 이러한 물리적 질서를 벗어나는 일이 없음이 거듭 확인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 그 자체’에 대한 이해는 아직 만족할만한 단계에 이르렀다고 말하기 어렵다. 그렇게 된 데에는 많은 이유가 있겠지만, 그 가운데 중요한 것 하나가 바로 우리가 일상적으로 지니고 있는 생명의 개념 자체가 부적절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리는 먼저 현재 우리가 지니고 있는 생명 개념이 어떤 점에서 부적절한지, 그리고 좀 더 적절한 생명 개념은 어떠한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언어의 의미는 습득과정에서 비롯되는 사적영역과 사용과정에서 비롯되는 공적영역의 양 면을 포함하고 있다고 봅니다. 일상적 의미에서는 사적영역이 강조되는 반면 전문적 의미에서는 공적영역이 강조되곤 합니다. 전문적 사실을 기술하는데 있어서 일상적 개념이 부적절함은 이미 양자론의 개념 설명 중 보어에 의해 지적된 바 있습니다. 이렇게 일상적 언어의 부적절함이 발견되었을 때 과연 새로운 개념적 이해를 위해 새로운 용어를 만들 필요가 있는지 아니면 기존의 용어를 새로운 개념에 맞도록 의미를 다듬어서 재사용할 것인지는 과학철학에서도 골치 아픈 문제에 속한다고 봅니다.

 

 

과학 바깥의 사람들은 흔히 과학은 만능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과학에 대한 기대가 깨질 때 실망의 폭은 겉잡을 수 없이 증폭되고 비판은 비난으로 바뀌게 됩니다. 생명현상 또한 물질현상으로 이해하는 이상 과학에 의해 잘 설명될 수 있다고 기대합니다. 그리고 설명이 부족하다 싶을 때 우군은 돌연 적군으로 표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설명에 앞서 객관성에 대한 이해가 절실히 요구되는 것입니다. 흔히 전문적인 견해들은 그 분야에 익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점이 많습니다. <온생명>이나 <낱생명>과 관련해서도 상황은 비슷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장교수님의 ‘생명’과 ‘생명현상’에 대한 설명의 배경을 올바르게 이해하지 못한다면 다소 엉뚱한 주장이 제기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봅니다.

 

 

장교수님의 설명에 따르면, <낱생명>이란 인간의 제한된 인식의 틀에 비친 <온생명>의 모습으로 즉 일상적 생명의 개념과 같은 의미라고 합니다. 언뜻 보면 <낱생명>이란 하나의 독립된 개체처럼 그려질 수도 있는데 여기서 ‘독립성’이란 생물학적으로 전혀 의미가 없다는 점을 유념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정확한 의미의 생명이란 <온생명>을 뜻해야 하며, 이는 일상 개념인 <낱생명>과 이의 생명현상을 지원하는 <보생명>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입니다. <보생명>이란 일단 ‘환경’으로 보아도 무방할 듯 싶습니다. 그렇다면 “생명이란 환경을 떠나서는 의미가 없다.”라는 말로 요약이 가능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흔히 생명에 대해서 얘기할 때는 미시적 관점에서 얘기하곤 합니다. 즉 환경을 배제한 채 생명체 하나만을 놓고 그 내부에서 일어나는 여러 현상들을 논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미시적 관점은 소극적 의미에서의 생명을 정의하게끔 합니다. 미시적 상황만으로는 생명이 유지될 수 없으므로 생명이란 반드시 거시적 상황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하더라도, <온생명>의 모형에서도 역시 <낱생명>과 관련하여 미시적 생명현상에 대한 해석이 보완되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장교수님은 <온생명>이라는 모형의 대상이 태양계까지라고 합니다. 따라서 이렇게 물리적인 대상을 갖춘 <온생명>이라는 개념을 굳이 종교적 의미와 연관을 갖는 비유로 볼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기능적 단위인 ‘성분’과 관련해서는, 실체적 단위와 비교를 통해 보다 엄밀한 정의가 요구되는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간단히 살펴본다면, 실체적 단위가 원자적 시각에서 기술된다면 기능적 단위는 분자적 시각에서 기술된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전자의 경우는 하나하나의 원소가 의미를 갖는 반면 후자는 전체로서의 배열이 중요한 의미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마투라나와 바렐라의 경우, ‘구조’라는 개념이 정적인 면을 나타내는데 반해, ‘조직’이라는 개념은 ‘구조’에 동적인 면이 가미된 상태를 의미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변화를 일으키는 주체는 단순한 ‘구조’가 아니라 역동적인 ‘조직’이라는 주장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생산자와 생산물의 관계를 보면 제한된 시각으로 인해 생명의 특성인 자체생성성의 의미를 소극적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들의 설명은 소극적 생명이라는 의미에서 <낱생명>과 일맥상통하는 면이 있긴 하지만, 장교수님의 지적처럼, 에너지와 엔트로피가 관련된 물리적 법칙을 따르는 거시적 세계와 연결되는 적극적 생명으로서의 <낱생명>은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판단됩니다.

 

 

<온생명>과 <낱생명>의 문제가 밝혀짐에 따라 다음으로 따라 나오는 문제가 바로 생명체의 ‘물리상태’와 ‘심리상태’ 사이의 관계라고 생각합니다. 이른바 <의식>의 문제입니다. 이렇게 <의식>이라는 문제에 부딪치게 되면 <낱생명>을 나누어 볼 필요가 생긴다고 봅니다. <온생명>의 대비로서의 <낱생명>이 아니라 <낱생명> 자체를 올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야 비로소 인간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한 차원 높은 세계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서부터는 철학의 도움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똑같은 사물을 보면서도 근본적으로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인식의 틀이 다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장교수님이 지적한대로 칸트의 ‘감성’과 ‘지성’은 이러한 인간의 인식의 틀을 이해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식의 객관적인 면과 주관적인 면을 이어주는 고리를 칸트로부터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여기가 이른바 철학자들이 얘기하는 ‘형이상학’에 대한 이해가 필요해지는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PHYSICS와 META-PHYSICS의 관계를 올바르게 이해한다면 철학자와 물리학자 사이에 생길 수 있는 오해의 폭을 줄일 수 있다고 봅니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에 대한 이해가 더욱 아쉬운 느낌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를 통해 칸트를 제대로 이해한다면 인간의 인식의 틀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물리학자의 ‘인식’과 철학자의 ‘재인’을 결합할 때 비로소 올바른 인간의 인식의 틀이 얻어지게 될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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