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석의 문제
2010.01.20 01:00
온생명은 생명을 주제로 하되 물리학에 기초를 두고 철학적 논의를 따르므로
존재론과 인식론의 양쪽 입장에서의 검토가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존재론과 인식론의 이야기와 해석이라는 문제를 짚어 보았습니다.
우리는 서로 인연(因緣)이 있어 이렇게 토론의 광장에서 만나 얘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인연의 ‘인(因)’이란 시간적 연접관계를 나타내고 ‘연(緣)’이란 공간적 연접관계를 뜻합니다. 즉 시간적으로 그리고 공간적으로 끈이 닿았기에 서로 만날 수 있게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런 시공간적 관계가 물리학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물리학이란 자연의 변화를 다루는 학문이고 자연의 변화란 운동을 기본으로 이루어지며 운동이란 결국 시공간을 무대로 일어나는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양자론과 상대론이 중대한 의미를 갖는 것은 이 두 이론이 인간의 인식에 대한 개념을 바꾸어 놓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인간의 인지 역사를 잠깐 살펴보면, 원래 ‘존재’와 ‘인식’은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는 개념이었습니다. 무엇인가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당연히 인식되어야 했고 또 인식된 것은 당연히 존재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던 어느날 인간은 인식주체가 인식객체를 인식하기 위해서는 인식매체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그런데 인식매체는 인식주체와 인식객체 사이의 시공간을 가로질러 놓여있어 존재와 인식 사이에 ‘빈틈’을 만들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존재와 인식 사이의 빈틈 중 공간의 빈틈이 양자론이라는 이름으로 탐구되고 시간의 빈틈이 상대론이라는 이름으로 분석되기에 이릅니다. 양자론과 상대론은 인간의 인식과 직접 연결되는 문제로 빈틈의 이해는 주로 해석이라는 방법론을 통해 시도됩니다. 존재와 인식 사이의 빈틈 문제를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먼저 ‘물리적 존재법칙’이라는 것을 다음과 같이 정의해 볼까 합니다. “한 물체는 동시에 두 공간에 존재할 수 없으며, 두 물체는 동시에 한 공간에 존재할 수 없다.” 그런데 사뭇 자연스러워 보이는 이 명제 중 ‘한 공간’이라는 개념과 ‘동시’라는 개념이 각각 양자론과 상대론에 의해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이러한 위협은 마침내 해석이라는 탈출구를 모색하게 됩니다. 한 전자가 원자 내에서 동시에 여러 공간에 퍼져 있다는 것을 받아들일 수 없는 인간의 인식론은 ‘확률’이라는 해석에 의해 타협점을 찾고자 하게 됩니다. 그리고 인과율까지도 위협하는 ‘동시’라는 개념의 이해에는 ‘광속 상한제’의 도입과 보존법칙의 포기를 각오하면서까지 타협점을 찾고자 하게 됩니다. 특히 양자론의 경우는 입자와 파동이라는 이른바 모순되는 두 성질의 공존이라는 문제로 인해 ‘상보성 원리’ 등의 기상천외한 아이디어가 나오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입자-파동’의 문제는 어쩌면 모순이 아닐 수도 있습니다. 입자-파동의 문제에서 입자는 존재론적 관점에서 설정된 개념인데 반해 파동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설정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즉 존재론적 입장과 인식론적 입장이 함께 뒤섞임으로써 일어난 일종의 혼란일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한 순간에는 입자였던 것이 어떤 이유에 의해 다른 순간에는 파동으로 행세한 예는 있어도, 과연 한 입자가 동시에 파동으로 행세한 예를 찾을 수 있을까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인식에 대한 철학적 고찰에서 ‘심신문제’라는 것이 이와 유사한 성격을 띠고 있다고 봅니다. 즉 몸과 마음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존재가 동시에 공존함으로써 인식론적 불편을 야기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실체2원론이라든가 속성2원론이라든가 하는 흥미로운 이론들이 쏟아져 나오게 됩니다. 하지만 ‘몸-마음’이라는 관계도 어찌 보면 ‘입자-파동’의 문제와 같은 혼란의 문제일 수 있습니다. 즉 몸이라는 개념이 존재론적 관점에서 설정된 개념인데 반해 마음이라는 개념은 인식론적 관점에서 설정된 개념이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마음이라는 것도 존재론적 입장에서 설정된 개념이라면 마음은 몸과 무관하게 존재하고 독립적으로 발견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마음이라는 존재가 몸과는 다른 차원의 존재이므로 몸이라는 존재와 동시에 독립된 존재로서 파악될 수 없다고 한다면 실체2원론은 포기해야 옳다고 봅니다. 속성2원론의 경우는 마음이 몸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라고 하므로 공존에 별로 문제가 없어 보이기는 합니다. 그러나 실체와 실체가 아니라 실체와 속성을 들먹이면서 왜 굳이 ‘2원론’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고 있는지 의문이 듭니다. 인간의 뇌는 곧잘 컴퓨터와 비교되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의 뇌는 컴퓨터처럼 다양한 소자들이 함께 어울려 회로를 형성하고 있지 않습니다. 있다면 단지 집적회로 한가지뿐으로 사실 뇌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집적회로처럼 보이기까지 합니다. 즉 뇌 안에서 달리 마음이 존재할만한 특별한 위치를 지정하기가 쉽지 않아 보인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르두와 같은 학자는 마음이란 3부작으로 자아의 다른 이름이고 자아란 결국 '시냅스'일 뿐이라고 강조합니다. 이러한 르두의 주장은 크릭이 그의 저서 『놀라운 가설』에서 “당신들은 뉴런 덩어리에 불과해요.”라고 했던 선언을 연상시킵니다. 이렇게 존재론과 인식론은 서로 뒤엉킨 채 물리학과 철학 그리고 신경과학 등 여러 곳에서 말썽을 피우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렇다면 존재론과 인식론을 좀더 깊게 이해하고 접점을 찾을수 있다면 문제는 달라지지 않을까요?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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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2010.01.21 1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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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헌터
2010.01.21 15:37
‘공간의 틈’과 시간의 틈‘에 대한 설명이 미흡했다는 생각이 듭니다.감각인식이란 인식매체가 인식객체와 상호작용을 일으킨 뒤 인식주체에 전송됨으로써 완성됩니다. 대표적인 인식매체인 ‘빛’을 예로 들면, (1)빛이 물체와 ‘상호작용’을 일으킨 뒤 (2)인간의 눈까지 ‘전송’됨으로써 인간은 물체의 존재를 인식하게 됩니다.
과거에는 (1)의 상호작용 따위는 없으며 {존재=인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양자론이 ‘h'라는 작용양자를 이용하여 (1)의 상호작용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1)의 상호작용은 비록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긴 하지만 결코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지게 됩니다. 즉 물체의 위치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1)의 상호작용으로 인해 (그 이전의 위치와 이후의 위치 차이만큼) 이른바 ’공간의 틈‘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또 과거에는 (2)의 전송 따위는 없으며 {존재=인식}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상대론이 ‘c'라는 광속을 이용하여 (2)의 전송에 필요한 시간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2)의 전송시간은 비록 무시할 수 있을 정도로 작긴 하지만 결코 없는 것은 아니라는 결론이 내려지게 됩니다. 즉 물체의 존재에 대한 인간의 인식에 (2)의 전송시간으로 인해 (그 전송시간만큼) 이른바 ’시간의 틈‘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그리고 바로 이 ‘공간의 틈’과 ‘시간의 틈’으로 인해 {존재=인식}이라는 과거의 공식이 깨지게 됩니다. 나머지는 {존재=인식}이라는 공식의 깨짐에 대한 구체적인 기술입니다.
그런데 ‘시간의 틈’을 메우기 위해 과연 공간까지 동원할 필요가 있었는가 하는 것이 상대론에 대한 엉뚱한 의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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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2010.02.11 21:38
타임헌터님의 댓글에 대한 짤막한 의견입니다.
상대성이론에 대한 표준적인 해석은 시간과 공간의 관계에 대한 것입니다. '전송'이라는 것이 일정한 공간상의 거리를 일정한 시간 동안 움직이는 것이기 때문에, 가령 빛 같은 것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결국 공간과 시간이 별개라고 생각했던 전통적인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다...는 것이 바로 상대성이론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라는 것이죠.
이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 않습니다. 상대성이론을 흔히 아인슈타인의 이론이라고 말하지만, 아인슈타인보다도 훨씬 더 정교하고 훨씬 더 깊이 있게 논의를 했던 사람은 프랑스의 앙리 푸앵카레였습니다. 아인슈타인이 1905년에 "움직이는 물체의 전기역학"이란 제목으로 상대성이론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논문을 발표한 것은 푸앵카레가 "시간의 척도"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시간의 측정 내지 척도에 대해 근원적인 얘기를 상세한 다룬 지 7년이 지난 뒤였습니다.
Poincaré, Henri (1898), “La mesure du temps”, Revue de métaphysique et de morale 6: 1-13
http://en.wikisource.org/wiki/The_Measure_of_Time
바로 이 논문에 타임헌터님이 언급하신 '시간의 틈'과 비슷한 논의가 담겨 있습니다. 문제는 푸앵카레 자신도 이 '시간의 틈'에 굳이 공간까지원할 필요는 없지 않겠는가 하고 생각했다는 겁니다. 아인슈타인은 푸앵카레보다 나았을까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실상 이 '시간의 틈'에 공간의 문제를 반드시 끌어들여야 한다는 점을 처음 밝힌 것은 아인슈타인의 대학 시절 은사이기도 했던 수학자 헤르만 민코프스키였습니다. 민코프스키는 1907년 12월에 독일 괴팅겐에서 열린 수학자-물리학자 학술회의에서 이에 관한 유명한 발표를 합니다. (발표문은 이듬해 9월에 학술지에 발표되었습니다.)
Minkowski, Hermann (1908). "Die Grundgleichungen für die elektromagnetischen Vorgänge in bewegten Körpern". Nachrichten von der Gesellschaft der Wissenschaften zu Göttingen, Mathematisch-Physikalische Klasse: 53–111.
어떤 면에서는 아인슈타인 자신도 민코프스키의 이러한 시공간에 대한 근원적인 혁명적 재개념화를 수용하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1916년 내지 1920년대에 가서야 일반상대성이론을 통해 비로소 시간과 공간의 결합된 형태로서 시공간 개념을 간신히 받아들인 것 같습니다.
여하튼 상대성이론이 정말 말해주려 하는 것은 '시간의 틈'이 '공간의 틈'과 결코 다른 것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한편 양자이론에서의 '작용양자' 개념은 원론적으로 시간이나 공간과 무관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전통적인 존재론적 관념에 따른다면, 시간 또는 공간과 물질은 별개의 것입니다. 물론 아주 밀접한 관계이긴 하지만 말입니다. '작용양자'의 문제는 물질에 대한 것이지 시간/공간에 대한 것이 아닙니다. 굳이 말하자면 양자이론에는 비상대론적 양자역학도 가능하고 상대론적 양자역학 또는 상대론적 양자장이론도 가능합니다. (실제로는 상대론적 양자역학은 자체적인 모순 때문에 성립하지 않기 때문에 그냥 관념상으로만 가능합니다.)
다시 말해서 시간/공간에 대한 선택은 '작용양자'의 문제와 독립적입니다. 이것이 제가 위의 댓글에서 지적하려던 것입니다.
앞으로 더 얘기 나누게 되길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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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ngbong
2010.02.12 05:48
단순하게 호기심으로 들어왔다가....
두분의 글이 넘 좋습니다.
머리가 쪼개질 만큼 ....
공부한다는 것이.....
기분좋게 합니다.
불현듯
두통이 오기 전에
[不一不二]
내 나름 결론을 내고 ....
조상님들 드실 음식 장만하러
대형마트로, 재래시장으로, 인터넷쇼핑으로
더 좋은 것 드시게 하고싶어
필요한 것 사러 갑니다.
명절 잘 보내세요!
잊지않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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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헌터
2010.02.13 13:26
언젠가 기회가 되면 발표하려고 정리해둔 글 중 상대론에 관한 부분을 먼저 언급해 보겠습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왕국>에서 어느날 총리와 관리 사이에 언쟁이 벌어졌습니다.
총리가 말하길 지난번에 지방 시찰을 가면서 보니까 <상대론>이라는 시골역의 벤치가 너무 작아서 사람이 몇 명 못 앉겠던데 좀더 긴 의자로 바꾸라고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러자 관리가 답변하길 자기가 지방 출장을 가면서 보니까 <상대론>이라는 시골역의 벤치는 그렇게 작은 의자가 아니어서 굳이 바꿀 필요가 없다고 했습니다. 왕궁 회의에서 총리와 관리는 각자 자기 의견을 놓고 격렬한 토론을 벌였습니다. 총리는 벤치가 짧다, 관리는 벤치가 짧지 않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차를 만든 문제는 과연 무엇이었을까요?
문제인즉슨, 출장비가 풍부한 총리는 KTX 열차를 타고 지방 시찰을 나갔고, 출장비가 부족한 관리는 완행열차를 타고 지방 출장을 나갔다는 사실입니다.
<벌거벗은 임금님의 왕국>의 <상대론>이라는 시골역에 가만히 놓여있는 벤치는, 빠른 이와 느린 이, 이렇게 보는 이에 따라 줄기도 하고 아니기도 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총리가 본대로 <상대론>이라는 역의 벤치를 줄게 한 힘은 무엇이었을까요? <벌거벗은 임금님의 왕국>의 <로박사>가 물리적인 힘을 찾기 위해 백방으로 애썼지만 허사였습니다. 그때 <돌박사>가 나타나 그것은 힘의 문제가 아니라 <상대론>이라는 시골역의 역사가 보는 이에 따라 휘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푸박사>의 생각은 좀 달랐습니다만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얘기하기로 하겠습니다.
그리고 며칠후 이번에는 총리와 관리가 동시에 <상대론>이라는 시골역을 통과하게 되었습니다. 출장비가 풍부한 총리는 이번에도 역시 KTX 열차를 타고 지방 출장에서 돌아오는 길이었고, 출장비가 부족한 관리는 이번에도 역시 완행 열차를 타고 지방 출장을 나가는 길이었습니다. KTX 열차에 타고 있는 총리가 완행 열차에 타고 있는 관리에게 휴대전화로 말했습니다. 보게! 벤치가 저렇게 작지 않은가? 동시에 관리가 휴대전화로 답했습니다. 도대체 어떤 벤치가 작다는 것입니까?
자, 지금 <상대론>이라는 시골역의 벤치는 작아야 될까요? 안 작아도 될까요? <돌박사>의 주장으로 바꾸어 표현한다면, 지금 시골역의 그 벤치는 어떤 휜 시골역사에 위치하고 있어야 할까요?
[不一(?) 不二(?)] 그렇기도 또 아니기도...^^
흥미로운 글 감사합니다. 존재론적 개념과 인식론적 개념을 혼동해서는 안 된다는 지적은 매우 타당해 보입니다.
발전된 논의를 위해 우선 한 가지만 의견을 달까 합니다.
"공간의 빈틈 --> 양자이론, 시간의 빈틈 --> 상대성이론"이라는 도식은 적절하지 않아 보입니다. 상대성이론은 시간과 공간(합해서 시공간)에 대한 논의이고, 양자이론은 시공간에 대한 논의라기보다는 시공간 속에서 운동하는 물질에 대한 논의이기 때문입니다.
파동을 인식론적 개념으로 보는 것도 적절하지는 않아 보입니다. 양자이론에서 소위 '파동함수'가 사실은 파동이 아니라 단지 확률을 나타내는 함수일 뿐이기 때문에, 양자역학의 '파동함수'는 인식론적 개념입니다. 그러나 모든 파동이 인식론적인 것은 아닙니다. 유체역학에서 다루는 많은 파동들은 눈 앞에서 관찰되고 실험실에서 직접 만드는 실체입니다. 전자기장도 일종의 파동으로 보아야 합니다. (단순히 전자기파만 파동인 것은 아닙니다.) 소위 입자-파동 이중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말하는 '파동'도 이러한 존재론적 대상을 가리킵니다. 데이빗 봄의 해석이나 드브로이의 파일롯 파동에서는 존재론적 개념으로서의 파동이 명시적으로 등장합니다.
관련된 내용을 직접 다루고 있는 책들이 많지만, 가령 장회익 선생님의 [물질, 생명, 인간]을 함께 논의할 기회가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http://www.greenacademy.or.kr/xe/?document_srl=354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