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설의 중국인(어) 방 논변(사고실험)
2010.01.22 16:03
(* 이 글은 지난 학기 수업에서 게시판에 썼던 글인데 관련이 될 것 같아 일부를 가져옵니다. *)
존 설의 중국인(어) 방 논변(사고실험)
설 자신은 "기계가 생각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부정하지 않았고, 우리 자신은 기계이지만, 생물학적 기계이고 지향성(또는 의식)은 생물학적 현상이라는 겁니다.
존스턴은 설의 논변을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1) 디지털 컴퓨터에서 작동하는 프로그램은 지향성(의식, 사고)을 가질 수 없다. 뇌의 계산적 속성은 정신 상태를 만들어내는 기능을 설명하기에 충분하지 않다.
(2) 사고나 의식은 본질적으로 생물학적이며, 따라서 우리 자신의 생화학적 계와 복잡성 면에서 동등한 인과적 물질적 계 없이는 재생될 수 없다.
앞의 얘기는 쉽게 말해서 '강한 AI'를 부정하는 것이라면, 뒤의 얘기는 신경과학적 인공지능의 가능성을 열어놓는 거랍니다.
펜로즈의 분류를 보면
A : 모든 사고는 계산이다. 특히 적절한 계산을 수행하기만 하면 의식적 인식의 느낌을 얻을 수 있다.
B : 인식은 뇌의 물리적 작용의 특징이다. 모든 물리적 작용은 계산으로 시늉내기를 할 수 있지만 계산 시늉내기는 그 자체로 인식을 일으킬 수는 없다.
C : 뇌의 적절한 물리적 작용은 인식을 일으키지만, 이러한 물리적 작용은 계산으로 시늉내기를 제대로 할 수도 없다.
D : 인식은 물리적, 계산적, 과학적 용어로 설명할 수 없다.
인데, 이 중에서 설의 논변은 A를 부정하면서 B를 옹호하는 셈입니다.
하지만 궁금증은 의식이나 사고를 지향성과 동일시할 수 있는가 하는 점입니다.
우선 지향성(intenionality)은 많은 정신상태에서 나타나는 특징으로 대략 정의됩니다.
(intentionality is a pervasive feature of many different mental states: beliefs, hopes, judgments, intentions, love and hatred all exhibit intentionality.)
http://plato.stanford.edu/entries/intentionality/
문제는 모든 정신상태에서 지향성이 나타나는가 하는 것이고, 게다가 그것이 곧 의식인가 하는 점입니다. 수업시간에 더 얘기를 해 보자고 해야지 했는데, 혹시 싶어 SEP를 찾아보니까 이 문제는 이미 폭넓게 논의된 주제더군요.
It can seem that consciousness and intentionality pervade mental life — perhaps one or both somehow constitute what it is to have a mind. But achieving an articulate general understanding of either consciousness or intentionality presents an enormous challenge, part of which lies in figuring out how the two are related. Is one in some sense derived from or dependent on the other? Or are they perhaps quite independent and separate aspects of mind?
(http://plato.stanford.edu/entries/consciousness-intentionality/ )
게다가 오래 전에 어느 자리에서 제가 '지향'이란 말을 쓸 곳에 '지향성'이란 말을 썼다가 예리한 철학자 한 분에게 지적을 받았는데, 성골(?) 내지 진골(?)로서의 철학 전공이 아닌 티를 낸 셈이어서, 제 자신은 '지향성'이란 용어에 약간 늘 긴장을 하게 되더라구요.
게다가 그게 영어로 intenionality인지 아니면 intensionality인지도 좀 헷갈리곤 했구요. 영어에서 '지향성'과 '내포'로 의미분화가 일어난 것은 중세 유럽에서 라틴어로 intentio가 가졌던 다의적인 측면이 연관됩니다.
(http://plato.stanford.edu/entries/intentionality/ )
하여튼 어느 철학자가 이 두 단어 사이의 차이에 대해 질문했다가 "대단히 좋은 질문입니다. 하지만 아무도 이 두 용어의 차이를 분명하게 이해하고 있지 못합니다."라는 대답을 들었다는 얘기를 적어 놓아서 재미있다고 생각했습니다.
(http://www.cse.buffalo.edu/~rapaport/intensional.html )
“중국어방 논변”은 존 설이라는 철학자가 마음에 관한 모든 이론을 테스트하는데 1인칭 경험에 호소하는 전략으로 제시한 사고실험으로 알고 있습니다. 즉 아무리 복잡하고 지능적이고 세련된 것일지라도 프로그램을 수행하는 계산기계는 심성과 동등할수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구성한 것입니다. 그리고 “중국어방 논변”은 <결여된 감각질>의 문제로 “좀비 논변”과 같은 성격의 문제로 볼수 있겠습니다.
“중국어방 논변”의 내용을 잠깐 보면, 중국어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어떤 사람이 일련의 기호들을 그와 다른 기호들로 체계적으로 변형시키는 규칙들의 집합을 갖추고 있는 이른바 “중국어방”에 갇혀 있다고 가정하고 시작합니다. 그리고 어떠한 중국어 입력에 대해서도 그 즉시 적절한 중국어 대답이 출력의 형태로 “중국어방” 밖으로 내보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중국어방”은 단순히 통사론에 기초해서 기호들을 조작할뿐 의미론에 의한 입력/출력의 변형은 아니라고 합니다.
“중국어방 논변”과 관련해서 존 설은 통사적 기호들은 의미를 낳지 않으며 의미들이 없이는 심성은 가능하지 않다고 주장합니다. 즉 마음은 의미론적 엔진인 반면에 컴퓨터는 단지 통사론적 엔진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존 설의 “중국어방 논변”은 비트겐슈타인의 “상자속의 딱정벌레”를 연상시킵니다. 모든 사람이 각자 “무엇”인가 들어있는 상자를 하나씩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무엇”을 딱정벌레라고 부르는데, 어느 누구도 다른 사람의 상자를 들여다 볼수 없고, 각자 자신의 딱정벌레를 봄으로써만 딱정벌레가 무엇인지 안다고 말합니다. 과연 우리는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상자 안에 갖고 있는 것이 분명히 모두 같은 딱정벌레라고 말할수 있을까요?
여기서 앤드루 브룩(데넷?)의 글에서 읽은 “오리 원칙”이라는 재미난 원칙을 하나 소개할까 합니다. “어떤 것”이 오리처럼 보이고, 오리처럼 뒤뚱거리며, 또 오리처럼 꽥꽥거린다면, 그 “어떤 것”은 오리일 수밖에 없다.
철학자들의 논의를 쉽게 이해하는 한 방편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지향을 "목적"으로 보고 지향성을 “목적의식”으로 해석하면 때로 이해가 쉬워지기도 합니다. 감각과 감각질의 문제는 지향과 지향성의 관계와 흡사해 보입니다. 이와 같은 "~임"의 문제나 "보여짐"의 문제는 “집합의 집합”이라는 수학적 개념을 이용하면 편리해 보입니다. 즉 “집합”은 “원소 자체”를 나타내고, “집합의 집합”은 “원소 임”을 나타낸다고 보는 방법입니다.
(1)감각={자극} (2)감각질={감각}={{자극}} (3)지향={향} (4)지향성={지향}={{향}}
존 설처럼 인간을 굳이 생물학적 기계라고 표현한다면 먼저 생명에 대한 정의가 필요할듯 싶은데, 생명체란 <에너지 대사>와 <정보 대사>를 갖춘 조직체라고 정의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그런데 김재권은 존 설에게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질문을 던집니다. 분자와 세포들로부터 어떻게 의미와 이해가 발생하는지? 그것들도 역시 컴퓨터와 같은 일종의 기계적 계산 구조는 아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