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자역학의 서울해석에 대한 단상
2010.04.13 15:45
양자역학의 서울해석과 관련하여 짧은 생각을 얘기해 볼까 합니다. 물리학의 여러 분야 중에서 양자역학은 유난히도 철학과 얽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무래도 존재의 본질이라는 문제와 연결되어 있어서 그렇지 않은가 싶습니다. 어쩌면 거시적 세계의 질서에 익숙해 있는 우리에게 미시적 세계의 질서가 낯설고 심지어는 거시적 세계의 질서와 상충되는 듯한 느낌마저 주기 때문인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이 문제를 장회익선생님은 물리량의 실재성과 해석이라는 관계를 중심으로 생각해 보신 것 같습니다.
우선 ‘실재성’이라는 개념을 생각해 보기에 앞서 먼저 ‘존재’라는 개념을 살펴보겠습니다. ‘존재’라는 단어의 한자말을 가만히 살펴보면 두 단어 모두 다음과 같이 ‘있을 유(有)’라는 글자를 중심으로 복합적으로 이루어진 글자임을 알 수 있습니다.
(1) {存 = 有 + 子}
(2) {在 = 有 + 土}
‘存’이라는 개념은 있기는 있는데 ‘子’와 관련된 개념으로 있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자식의 세대로 이어지는 존재 즉 <시간상의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그리고 ‘在’라는 개념은 있기는 있는데 ‘土’와 관련된 개념입니다. 다시 말해 땅위에 있는 존재 즉 <공간상의 있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존재’라는 글자는 시간성과 공간성을 함께 나타내고 있습니다.
장선생님은, ‘실재성’이란 개념 그 자체가 “관측 가능한 사물의 독자적 존재성과 더불어 이것의 시간적인 존속성 개념을 일반화시켜 만들어 낸 하나의 보편 관념”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하면서 실재성과 관련해서 세 가지 조건을 강조합니다. 즉 ‘관측가능성’, ‘독자적 존재성’, 그리고 ‘시간적 존속성’ 입니다. 그런데 장선생님의 설명을 따라가 보면, ‘독자적 존재성’이란 공간상의 존재 개념을 의미하고, ‘시간적 존속성’이란 시간상의 존재 개념을 의미함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두 가지 조건은, 방금 글자에 대한 설명에서 살펴보았듯이, ‘존재’라는 단어의 원래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리고 첫 번째 관측가능성은 물리적으로 인식될 수 있어야 한다는 조건으로 존재의 실체성을 뜻하는 것으로 보입니다.
그런데 ‘실재성’이라는 개념이 이와 같이 ‘실체성’이라는 개념을 안고 있다면 ‘관측’이라는 개념에 대해 좀더 뚜렷한 한계를 그을 필요가 있어 보입니다. 흔히 생각하기에 ‘관측’이란 ‘물리적 인식’을 의미한다고 쉽게 생각해 버릴수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직접적으로는 물리적 인식이 가능하지 않고 물리적 계산을 통해서만 인식되는 그런 물리량에 대해서는 이와 같은 실재성 개념의 적용이 쉽지 않아 보이기 때문입니다.
한편 장선생님은 동역학적 인식 구조와 관련하여 경험표상의 영역과 대상서술의 영역 이렇게 두 영역의 존재를 주장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구분이 바로 인간의 인지기제를 이루고 있는 두 단계인 ‘인식’과 ‘재인’의 개념과 동일하다는 생각을 저 혼자 해봅니다. ‘인식’과 ‘재인’이라는 두 개념을 물리적 인지와 형이상학적 인지로 보고 있는 저를 비롯해서 특히 과학철학과 관련된 작업을 하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있어서 동역학적 인식 구조와 관련된 이 두 영역의 구분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이 두 영역의 구분을 통해서만이 ‘실재성’이라는 개념이 그 진정한 의미를 드러낼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희한하게도 '실재성'이란 개념은 과학과 철학에서 모두 무척 중요한 개념인데도 아직 모호한 상태로 남아있는 것 같습니다.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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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2010.04.15 19: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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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然
2010.04.15 19:29
아, 한 가지 덧붙입니다.
인식의 구조에서 '경험표상 영역'과 '대상서술 영역'의 구분이 '인식'과 '재인'에 상응한다는 지적이 흥미롭게 느껴집니다. 게다가 그것이 인식기제의 두 단계라면 더 재미있어집니다. 작년에 출판된 장회익 선생님의 [물질, 생명, 인간]에서 특히 1장을 보면 칸트가 순수이성비판에서 '감성'(Sinnlichkeit)과 '지성'(Verstand)을 구분하고 이를 다시 '직관'과 '개념'으로 연결시키는 것에 대해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을 연결시켜 논의하고 있습니다.
다만 질문이 생기는데, '재인'이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궁금해집니다. 아마도 再認이고 영어로 recognition이라고 한다면, 얼핏 두 가지(또는 2단계)로 구분한다는 점에서 통하는 게 있어 보이긴 하지만, 과연 이 개념쌍들이 서로 어떻게 만나거나 엇나갈지 꼼꼼하게 따져 보아야 할 것 같습니다.
경험표상 영역 <==> 대상서술 영역
인식 <==> 재인
물리학적 인지 <==> 형이상학적 인지
감성 / 직관 <==> 지성 / 개념
중요한 문제인데 좀 어려운 느낌입니다.
혹시 싶어 MIT 인지과학 백과사전을 찾아보니 recognition은 통상적 의미의 '인식' 즉 '무엇인가를 알아채는 것'의 의미로 쓰고 있습니다. '재인'이란 말의 의미가 궁금해집니다.
반가운 글, 즐겁게 읽었습니다. 타임헌터님, 잘 지내시죠?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에서 가장 핵심이 되는 것은 물리량의 실재성을 양보하고 국소성을 지키려 한다는 점이겠습니다.
'존재'라는 글자를 해부해서 그것을 '시간상의 있음'과 '공간상의 있음'으로 나누어 생각하는 것은 이제까지 별로 생각해 본 적이 없습니다. 子와 土를 각각 '시간'과 '공간'으로 확대해서 해석해도 좋을지 조금 염려되긴 하지만, '존재'라는 글자 자체에 이미 시간과 공간의 개념이 모두 들어 있다는 것은 아주 흥미롭습니다.
사실 제 자신은 '실재'라고 써 놓고 읽기는 reality라고 읽는 안 좋은 습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배운 게 도둑질이라고 한자보다도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먼저 떠올리는 버릇이 있는데, 극복해야 할 자세라는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저는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에서 관심을 두는 '실재성'은 '사물'의 실재성과는 관련이 별로 없다는 견해를 갖고 있습니다. 사물은 事物 이라고 (확대)해석할 수 있고, 이는 다시 事+物로 보아 사건(event)과 물질(matter)을 가리킨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에서는 이 두 가지 모두에 대해서는 자연스럽게 '실재성'을 인정하고 있습니다. 실험실의 상황에서 '관측'을 한다는 것은 곧 '사건'으로 이상화시켜 정의할 수 있습니다. 또한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에서는 동역학의 이론적 구조 속에서 '특성'이라는 범주를 두는데, 이것은 양자역학 서술의 대상이 되는 녀석의 실재성을 전제하는 것에 준합니다.
양자역학의 서울해석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사건이나 물질의 실재성이 아니라 오히려 물리량의 실재성입니다. 그 근거로 벨 논변을 드는데, 벨 논변에 대한 해석이 다른 해석들과 다릅니다. 벨 논변은 (1) 물리량의 실재성 (2) 국소성 (3) 몇 가지 물리법칙(e.g. 운동량 보존법칙) 등으로부터 일련의 부등식을 유도하고, 이 부등식이 양자역학과 충돌함을 보인 뒤에, 실험적 확인이 대체로 그 부등식을 '반증'하기 때문에, 양자역학을 옹호하거나 실험적 확인을 신뢰한다면, 벨 부등식으로 이어지는 전제들 중 하나를 부정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많은 (주류의) 해석들이 이상하게도 (1)의 물리량의 실재성을 지키기 위해 (2)의 국소성을 포기하는 셈인데, 그렇게 하긴 힘드니까 대신 계의 분리불가능성이라는 개념으로 이를 확장합니다.
서울해석은 분리불가능성이라는 납득하기 힘든 개념을 끌어들이는 대신 물리량의 실재성을 포기하기로 한 선택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사건의 실재성이나 물질(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자entitiy)의 실재성까지 포기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