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세미나 4기 파이널에세이 얼렁뚱땅

마음세미나에서 마음의 길을 묻다.                             

 

 2조 송 양 수

 

마음세미나를 마치면서

5월부터 시작된 마음세미나의 여정이 끝났다. 이곳을 찾은 이유는 건너건너 듣기로 유식불교에 정통하신 분이 정화스님이신데 그 스님이 수유너머남산에서 강의하신다 하고 마침 그때 마음세미나4기의 광고를 보았고 정화스님도 소개되어 있었던 터라 이것을 듣게 되었다. 사실은 마음에 무거운 짐을 지고 여기를 찾았던 것이 아니었던 지라 처음 분위기를 보고는 당황한 측면도 있었다. 한 회 한 회 지나면서 여러 가지 경험을 듣고 모두가 고통을 나누고 있다는 것과 답을 찾기 위해 애 써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공부 하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겠고 어찌 보면 삶의 국면 하나하나가 마음공부가 아닌 것이 없겠지만 그래도 특히 내가 마음세미나 4기를 통해 한 마음공부에 대해 정리하고자 한다.          

 

불교와 나

불교에 대한 개인사적 배경이 깊은 편은 아니지만 그래도 다소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종교적 신앙의 측면은 아니었고 규칙적인 수행이나 명상을 통한 마음의 안정이라는 측면에서 불교를 처음 접하게 되었고 횟수로는 3년 정도 된 일 같다. 마음세미나에 참가하게 된 동기에는 불교를 더 알아보자는 것은 있지만 그 방향이 수행에 대한 기대보다는 다소 학구적인 쪽이었다. 나가자와 신이치, 가와이 하야오의 <불교가 좋다>, 정화스님의 <반야심경> 두 책을 읽었고 정화스님의 법문도 들었다. 딱 정리되는 것은 없지만 그래도 새롭게 깨달은 바가 있어 그것을 적고자 한다. 앞으로의 이야기는 특히 2조의 토론 시간에 우리가 길을 찾으려 두런두런 이야기하는 과정에서 어쩌면 이것은 오류가 아니었을까 하면서 스쳐간 생각이다. 그 생각의 결이 다소 섬세하고 희미하게 느껴진 것이라 잘 찾아서 따라 갈지 걱정이 된다.

 

고통에 대하여:

고통이 없으면 수행도 없다. 마마스 앤 파파스가 부른 캘리포니아 드림 가사에 Preachers like cold이라는 구절이 있다. 그것처럼 수행을 외치는 목소리는 반드시 세상의 고통을 강조한다. 듣는 자의 공감을 얻으면 그 고통은 현실이 되지만 때로는 공감을 얻지 못하는 상황도 생각할 수 있다. 즉 지금 이대로 좋다거나 지금 이대로는 불만족하지만 그래도 다른 대안은 없으니 감수하겠다고 하면 또 그것으로 그만이다. 그렇지만 대부분은 고통을 겪고 삶이 불만족해서 수행을 외치는 목소리에 공감을 하고 다른 대안을 기대한다. 그런데 사실 그 대안이란 지금 이대로 좋다는 것을 인정하거나 지금 이대로 불만이더라도 다른 대안은 없으니 감수하는 마음가짐을 갖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생각하는데 고통이 어디 있는가? 고통은 그것을 인정하는 마음에 있다. 인정하지 않으면 고통도 없다. 수행은 어디 있는가? 수행은 계속되는 고통에 있다. 그래서 고통이 없으면 수행도 없다. 고통이 없으면 수행하지 않아도 되고 수행하지 않아도 고통이 없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나는 현재 삶에 대한 고통이나 불만이 없더라도 그래도 수행은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앞의 결론과 모순이 되는데 어째서 그렇게 생각할까? 앞으로 고통은 다가올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세상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수행은 다가올 고통에 대한 예방책이 될 수 있다. 세상의 고통에 대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고통에 직면했다고 여기는 순간 정화하는 방법밖에 없지 않을까?   

 

개인의 구원에 대하여:

개인의 구원이란 무엇일까? 개인이 자신의 삶에 만족하는 것이다. 사회적으로 인정 받을 필요도 없고 도덕적으로 고상할 필요도 없다.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삶에 만족한다면 그것이 구원이 아닐까? 그렇다고 하면 이런 질문이 꼭 따르게 된다. 조건이 갖추어져 있으니까 만족한 것이 아닌가? 지금 삶의 조건들을 제거해보라. 만족하겠는가? 일견 논리적으로 떠올리는 질문 같지만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논리적이지 않다. 조건 때문에 만족한다는 가정을 세워놓고 그것에 맞춘 질문이다. 사실은 동어반복인 것이다. 비슷한 예로 집착을 버리라 하면 다 버리면 어떻게 사느냐는 물음을 한다. 이 역시 일견 논리적으로 떠올리는 질문 같지만 이 역시 버리라는 의미가 어떤 상자에 담긴 물건이 하나하나 버려져서 상자가 비워지듯이 생각하여 다 버리면 아무것도 없고 무엇으로 살아가느냐 하는 이미지로 이어진 것뿐이다. 집착을 버리라 이미지는 사실 속박을 끊어버리는 이미지로 생각하는 것이 맞다고 본다. 가려졌던 눈이 뜨여지고, 묶였던 손이 풀리고, 족쇄에 채워졌던 다리가 해방되어 자유로운 움직임을 찾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개인의 구원의 느낌도 이런 것이 아닐까 한다.

 

현재를 사는 것에 대하여: 

현재를 사는 것이란 무엇인가? 현재의 삶의 과거의 기억의 족쇄로 묶어두지 않고 또한 미래에 대한 기대의 틀 안에 가두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현재에 집중한다. 현재에 집중하는 삶이란 어떻게 사는 것인가? 지침을 찾으려 해보지만 잘 되지 않는다. 현재란 무엇인가? 지금 나에게 닥친 일. 집중이란 무엇인가? 지금 나에게 닥친 일에 마음을 두고 정성을 다해 그 일을 완수하는 것이라 쉽게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런데 조금 깊이 생각해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닥친 일이 없는 경우는? 일이 있더라도 그 일의 싫어하는 마음이 명백한 경우는? 등등 해결할 수 없는 경우를 많이 떠올릴 수 있다. 이것은 집중이라는 말의 함정에 걸린 것이다. 보통 집중이라고 하면 어떤 대상에 집중한다고 생각하기 쉬운데 현재에 집중하라집중은 나의 마음에 무엇이 일어나는지 관조하라는 의미이다. 잘 생각해보면 현재란 다름이 아니라 지금 내 마음이 있는 곳이다. 나의 마음이 지금 어디 있는지를 안다면 나는 현재를 사는 것이다. 이 느낌은 지속시키기가 쉬울 것 같으면서도 참 어렵다. 

 

과학과 나

이번 마음세미나에서 접하게 된 과학책은 제러드 다야몬드의 <제3의 침팬지>, 스티븐 제이 굴드의 <다윈 이후>, 샤론 모하렘의 <아파야 산다> 였다. 기회가 많지 않지만 그래도 이러한 과학책을 접하게 되면 새롭게 알게 되는 놀라운 사실이 많다. 과학을 비난하는 사람도 많다. 그런 사람들이 과학을 안다고 생각되지는 않는다. 그들이 비난하는 것은 잘 들어보면상업적으로 이용된 공학기술인 경우가 많은데 그 비난도 들어보면 그냥 싫다는 차원에서 맴돌고 있지 않나 싶기도 하고 경우에 따라서는 자신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해 세상이 잘못되기를 바라는 사람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 심정이 이해되기도 하지만 나는 과학기술의 폐해에 대해서도 과학적으로 대처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인간의 모습을 인간중심적이지 않는 방법으로 말해주는 과학을 좋아한다. 물론 과학자도 인간이라 인간의 흔적을 지울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흔적을 종국에는 스스로 볼 수 있게 하는 장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과학에 대한 나의 기본적인 생각이다. 이것을 바탕으로 내가 2조에서 토론하는 중에 느꼈던 모순의 순간에 대하여 왜 그런 느낌이 들었을까? 에 대해 생각해보고자 한다.    

 

과학적 사실을 개인의 삶에 직접적으로 적용할 수 있는가? :

우리 대부분은 어떤 과학적 사실을 새로 알게 되었을 때 그것으로 곧 자신의 삶을 설명하려는 경향이 있다. 그런데 그것이 자기가 기존에 믿어왔던 방향과 일치할 때는 갈등이 없겠지만 그것과 일치하지 않을 때는 갈등이 생긴다. 그것은 자신의 견해보다는 과학자의 견해가 더 맞을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것과 일치하지 않는 자신의 견해에 대해 회의가 생길 수 있다. 혹은 그 반대로 과학에 대한 불신이 생길 수도 있다. 인간에 대한 과학적 혹은 학문적인 사실들이 있고 그것에 대해 인간사회의 차원에서 대처하는 방식과 한 개인으로서 인간이 대처하는 방식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한다. 개인은 자기의 견해가 자신의 근거 없는 믿음이고 아집에 불과할지라도 그것을 고집할 수도 있다. 대체로 과학적 혹은 학문적인 사실은 통계적 수치를 전면에 드러낸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통계적이다. 즉 그것은 한 개인을 관찰한 결과가 아니라 인간 일반이거나 충분히 많은 수의 인간이 보이는 경향에 관한 것이다. 그래서 과학에서 따르면 인간이 이러이러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물론 개인은 이러한 것을 통해 자신의 성찰할 기준이나 기회로 삼을 수 있다. 그렇다고 해서 그것이 자신이나 혹은 타인을 단정할 결정적 증거를 제공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여러 방향으로 나름대로 움직이는 인간들을 보니 이런 경향을 나타내더라 하는 것이지 그것이 현재, 한 인간의 선택과 행동을 결정짓는 것은 아니다. 이것을 성찰의 기회로 삼고 자기 이해의 기회로 삼는 것은 타당하지만 자기변명의 이유로 삼거나 혹은 과학에 대한 불신의 마음을 높이는 식으로 작용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그러한 과학적 사실은 지금 나의 선택과 행동을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불교와 과학:

불교와 과학은 내가 좋아하는 두 가지이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둘이 내 마음 속에 공존하면서 대립을 일으킨 일은 없는 것 같다. 마음세미나의 부제가 불교와 과학의 만남인데 나는 사실 그 부제를 보고 이 세미나에 참여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렇지만 과학책을 읽으면서 2조에서 토론하는 중에 이것이 불교와 무슨 상관이 있을까 하는 이야기가 많이 나왔다. 이것은 나에게 나는 왜 상관이 있다고 당연히 여기고 있을까? 하는 점을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물론 그 이유로 첫번째는 나에게 영향력을 끼친 몇 분 불교수행자께서는 언제나 과학친화적으로 말씀을 했다는 것을 들 수 있겠다. 과학과 친하다는 것! 그것이 내가 불교에서 받은 첫인상이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면 두 번째 이유는 없는 것 같다. 그 뒤로 과학책을 볼 때는 불교적으로 읽고 불교책을 볼 때는 과학적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즉 과학과 불교에 대한 앎을 통해 내가 형성해나가고 있는 세계가 그렇다는 것이지 세상에 있는 과학이 불교를 증명해주지는 않고 세상에 있는 불교가 과학을 증명해 주는 것이 아니다. 과학과 불교가 활동하는 혹은 기능하는 영역은 다르다. 과학은 자연에 대해서 말하고 불교는 인간에 대해서 말한다. 물론 과학도 인간을 말하고 불교도 자연을 말한다. 그렇더라도 그것을 다루는 방식은 다르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내가 불교적 틀을 가지고 과학적 사실을 대하더라도 그것은 과학적 방식으로 다루어져야 한다는 뜻이다. 일견 이것은 과학적 엄밀성에 대한 걱정처럼 보이지만 내가 과학자도 아니고 그런 걱정을 할 이유는 없다. 다만 나는 사고의 엄밀성이라랄까 그런 것에 신경을 쓰는 것 같다. 내가 맞다고 하는 근거만 찾기 보다는 내가 맞지 않다고 하는 사실도 솔직하게 고민을 해보아야만 할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일반론으로 받아들여 그렇다면 다 알기 전에는 한 마디도 주장할 수 없는 것이냐?는 반박할 수 도 있는데

이것도 우리가 즐겨 저지르는 오류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주장을 하지 말라고 하지는 않는다. 특히 그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에 대해서도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또 반대 주장의 뒷받침하는 근거에 대해서도 열린 마음을 가지라고 말할 뿐이다.

 

글을 마치면서

이상이 내가 마음세미나4기를 통해 깨닫게 되었던 마음의 오류이다. 당시는 이유는 모르고 다만 말이 더 이상 안 된다거나 공허하다는 느낌을 가졌다. 내가 믿기로는 마음수행의 길은 현재의 내 마음에 깨어있는 것이고 또한 할 수 있다면 그 마음의 연원에 대해 성찰해 보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오류가 발생하는 순간의 공통점은 모든 것이 바로 이 순간이고 그것으로 끝인데 우리는 계속 거기서 일반론을 찾으려고 할 때인 것 같다. 일반론을 찾고자 하는 것! 그것이 언어가 가진 속성 때문인 것도 같고 자성을 유지하려는 인간의 속성 때문이기도 한 것 같다. 글을 마치기 전에 한 마디 덧붙이자면 우리 2조의 멤버들은 이러한 속성 외에도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경향이 무척 강하다고 생각했다. 이야기를 하다 보면 어느새 우리는 더 바르게 살기 위한 지침을 세우려고 애쓰는 와중에 있었다. 이것이 가장 강력한 오류인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바르게 살고자 하는 것! 그것은 지금까지도 해왔던 일인데 잘 되지 않아서 이곳에 모였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가 바르게 살지 않기 위해 고민하면서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더라면 어떠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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