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생명, 보어의 1932년 강연 그리고 ...
2012.04.15 19:26
1932년 8월 15일 덴마크 코펜하겐(쾨벤하운)의 "빛 치료 국제 학술회의"(International Congress on Light Therapy)에서 닐스 보어가 "빛과 생명"이라는 제목의 기조강연을 했습니다. 에르빈 슈뢰딩거가 "생명이란 무엇인가?"(What is Life?)라는 제목으로 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컬리지에서 강연을 한 것이 1943년 2월이었으니까 그보다 11년 앞선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원자물리학을 개척해 가고 있던 이론 물리학자들이 생명현상에 이렇게 관심을 가진 것은 좀 신기한 일이었던 모양입니다.
다음 달 "녹색문명공부모임"에서 산지기님이 "빛과 생명현상"이란 내용으로 발표를 하신다길래, 그리고 어제 이 문제를 산지기님과 한참 얘기하기도 해서, 관련된 자료를 찾아보았습니다.
다행히 좋은 자료를 몇 개 구했습니다. 그냥 산지기님에게 메일로 보낼까 하다가 여기에 올려 두면 여러 사람에게 도움이 되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보어의 강연은 덴마크어로 되었고, 처음 원고도 역시 덴마크어였는데, 그 국제학술회의의 공식언어가 영어였고, 그 내용이 이듬해(1933년) [네이처]에 두 번에 나누어 실렸는데 이 원고는 덴마크어로 되어 있던 초고를 영어로 번역한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보어 자신이 번역한 것이니까, 번역이라기보다는 새로 쓴 것이 되겠네요.
(더 상세한 것은 http://nd.edu/~hps/McKaughan.pdf 참조. D. J. McKaughan (2005). The Influence of Niels Bohr on Max Delbrück: Revisiting the Hopes Inspired by “Light and Life”, Isis, 2005, 96:507–529)
Niels Bohr, “Light and Life,” Nature, 25 Mar. 1933, 133:421–423 (Pt. 1), 1 Apr. 1933, 133:457–459 (Pt. 2)
아쉽게도 이 원고는 학교 도서관 계정으로도 접근이 안 되고, 좀 비싼 가격으로 구매해야 합니다. 바로 그 옆의 원고는 그렇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원고가 워낙 유명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다행히 이 원고는 나중에 보어의 철학적인 글들을 모아 따로 출판한 책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책은 인터넷 상에서도 쉽게 구할 수 있습니다.
The Philosophical Writings of Niels Bohr, Vol. 2: Essays, 1932–1957, on Atomic Physics and Human Knowledge (Woodbridge: Ox Bow, 1987), pp. 4–12.
(http://archive.org/details/AtomicPhysicsHumanKnowledge )
보어의 강연 원고는 독일어로도 번역되어 [나투어비센샤프텐]에 실렸습니다.
Bohr, “Licht und Leben,” Naturwissenschaften, 1933, 21:245–250.
이 특별한 강연에 참석한 26살의 막스 델브뤽(Max Delbück)은 갓 박사학위를 받은 상태였고, 이 강연을 아주 심각하게 받아들여 인생 전체의 방향을 정하게 됩니다. 나중에 박테리가 돌연변이를 통해 바이러스에 대한 저항력을 얻게 됨을 밝힌 공로로 1969년 노벨 생리의학상을 받았습니다.
델브뤽은 1962년에 다시 보어를 초청하여 "빛과 생명 다시 보기"(Light and Life Revisited)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듣습니다. 독일 쾰른의 유전학 연구소에서였습니다.
Bohr, “Licht und Leben - noch einmal” Naturwissenschaften, 1963, 57:725–727.
1976년에는 델브뤽 자신이 "빛과 생명 III"이란 제목으로 다시 강연을 했습니다. 이번에는 칼스버그 연구소 100주년 기념을 위한 초청강연이었습니다.
CARLSBERG RESEARCH COMMUNICATIONS
Volume 41, Number 6, 299-309, DOI: 10.1007/BF02906138
(Lecture given at the Centennial of the Carlsberg Laboratory, Copenhagen, September 27, 1976)
보어의 강연 원고 중 독일어로 된 것은 아무래도 독자가 별로 없을 것 같아서 여기에 첨부하지는 않습니다. 대신 델브뤽의 강연 원고는 여러 모로 유익한 정보가 가득해서 여기에 첨부해 둡니다.
그리고 자료를 하나 더 올려 놓습니다.
보어의 강연과 직접 연관되지는 않지만, 소위 "광생물학"과 관련된 가장 최근의 연구성과가 잘 정리되어 있는 일종의 논문집입니다. 논문집이라기보다는 주요 내용을 잘 정리해 놓은 교과서 같은 느낌입니다.
상세한 서지사항은 아래와 같습니다.
Lars Olof Bjorn ed. (2008). Photobiology: The Science of Life and Light, Springer. 2nd ed.
광생물학(photobiology)이란 분야의 이름은 익숙하지 않은데, 가장 손쉽게 생각하면 빛을 이용하여 포도당을 생산하는 녹색식물들의 광합성이 떠오르고, 동물이든 식물이든 빛에 아주 민감하게 반응한다는 점을 거론할 수 있겠습니다. 사실 엑스선이나 감마선이 돌연변이를 일으킨다는 사실도 빛과 생명 사이의 관계를 말해 주는 것이 되겠죠. 여하튼 이 책은 소위 "생명과 빛의 과학"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을 교과서 수준에서 모아 놓은 것이라 꽤 유용해 보입니다. 다만, 이 책은 어느 정도 수준의 물리학, 생화학, 생물학의 지식을 가지고 있어야 읽어갈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편저자인 라스 올라프 뵤른의 시가 아주 인상적입니다.
Photobiology (L.O. Björn 2002)
I am lying on my back beneath the tree,
dozing, looking up into the canopy,
thinking: what a wonder!—I can see!
But in the greenery above my face,
an even greater miracle is taking place:
Leaves catch photons from the sun
and molecules from air around.
Quanta and carbon atoms become bound.
Life, for them, has just begun.
The sun not only creates life, it also takes away
mostly by deranging DNA.
Damage can be, in part, undone
by enzymes using photons from the sun.
Summer nears its end, already ’cross the sky
southward aiming birds are flying by.
Other birds for travel choose the night
relying on the stars for guiding light.
Imprinted in their little heads are Gemini,
Orion, Dipper, other features of the sky.
There is room for clocks that measure day and night,
Correct for movement of the sky and tell the time for flight
Deep into oceans, into caves
the sun cannot directly send its waves.
But through intricacies of foodweb’s maze,
oxygen from chloroplasts, luciferin, luciferase,
at times, in place, where night and darkness seem to reign,
solar quanta emerge as photons once again.
시의 압운(라임)도 인상적이지만, 햇빛과 생명의 관계가 얼마나 가까운지 잘 보여주는 시 같습니다.
빛과 생명의 관계는 상당히 흥미로운 생각거리를 던져 주는 주제입니다. 새삼 오래된 생화학 책을 다시 열어 광합성을 들여다 보고 있습니다.
댓글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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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모작
2012.04.1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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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2.04.17 11:12
이모작님, 과찬이십니다. 이 자료는 산지기님의 다음 달 발표를 위한 것이구요. 새삼스럽게 "녹색"아카데미에서 "녹색"문명을 고민하면서 공부하고 있는데, "녹색"식물에 대해 제가 많이 모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오래 전에 공부했던 광합성을 다시 들여다 보면서 참 신기한 현상이라는 생각이 물씬 듭니다.
다음 달 모임에서 산지기님이 아주 재밌는 얘기를 해 주시리라 기대해 봅니다.
이모작님이 공부에 도전하시겠다고 하셔서, 제가 가지고 있는 광합성 관련 자료를 첨부해 둡니다. 파워포인트 파일은 대학 저학년 정도면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구요. 피디에프 파일은 책의 한 장인데, 깔끔하게 정리가 되어 있습니다. 단점은... 영어라는 건데요. 참, 이 부분은 어쩔 수 없는 한계라는 생각도 듭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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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쏭
2012.04.19 10:31
빛과 생명
빛은 생명의 고향
빛이 있으라
했을 때
무엇이 일어났을까?
밝아졌을까?
움직임이 있었을까?
그렇구나
생명은 움직임.
어두움은 생명의 무덤
어두움은 멈춤.
지금은 이 정도 생각할 수 있지만
5월 산지기님 발표를 듣고 나면
더 깊은 생각을 할 수가 있겠지요?
순서 바꾸어 주어서 감사합니다.
그리고 자연님이 주신 흥미로운 책은
느릿느릿하지만 읽고 있습니다.
아직 1장 정도까지 읽었어요.
근데 제가 지난 10월부터 하루에 한 글자라는 경이로운 속도로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그게 바로 스피노자의 에티카입니다.
그래도 이제 '신에 대하여' 는 한달정도면
마칠 수 있다는 희망이 보입니다.
근데 왜 이 이야기를 하냐 하면
지금 생각으로는 감상문을 쓸 때
두 책을 만나게 해 볼 생각입니다.
어쩃든 뭐가 되든 말이지요
흐흐흐
( -______-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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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2.04.19 13:44
오호, 에티카!!! 이전에 온생명론 공부모임에서 2년 가까이 에티카를 강독했었답니다. 그 때는 지난 1월에 오셨던 전대호님과 김정현님도 함께 하셨고, 나름 한국어판 외에도 라틴어와 독어와 영어판을 함께 갖다 놓고 의미심장하게 공부를 했더랬죠. 그래서 저도 덕분에 스피노자에 대해 상당한 감을 갖게 되었구요.
빛이란 문제는 신기합니다. 소위 '구약성서'를 기반으로 하는 세 종교,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바로 '빛'이고, 고대 인도의 베단타 철학에서도 태초의 인간들은 빛을 먹고 살았다는 얘기가 나오는 걸로 보면, 빛은 언제나 신성함과 함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빛은 생명의 고향... 멋진 표현입니다. ^^
위너 책 재밌게 읽어 주셔서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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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쏭
2012.04.20 21:26
스피노자 세미나가 있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장기간에 걸쳐
여러 책을 비교하면서
본격적 전문적으로 공부한지는 몰랐네요.
반가운데요.
제가 물어보거나 의견을 들어보면 좋겠다 하는 부분이 많은데요...
가끔 질문해도 될까요?
그렇잖아도 이걸 어디 정리해봐야겠다해서
제 블로그에 스피노자방을 하나 만들었어요.
아직 글을 올리지는 않았지만
거기에 궁금한 걸 올려 놓으면
가끔 들어오셔서 코멘트해주시면
무척 고맙겠습니다.
오 ! 뭔가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은데......
일단 글을 쓰는 게 먼저겠지요.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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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2.04.20 22:29
스피노자 방, 기대가 됩니다. 물론 저도 그렇고 스피노자에 대해 전문성을 갖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토론 차원에서 의견을 개진하고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 참 좋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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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님, 언제나 풍부한 자료와 공부의 방향을 잡아 주시는군요. 요사이 시간이 나지 않고, 마음의 여유도 없어 공부를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만, 언제나 이렇게 친절히 안내를 해 주니 너무 고마워요. 조금이라도 도전을 해 보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