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녹색아카데미


'위탄'과 '나가수' 그리고 '1박2일'의 경쟁 

김종엽 /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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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 전 창비주간논평을 통해서 나는 경쟁의 이중구조라는 개념으로 우리 사회의 특징을 살핀 적이 있다(<진보-보수의 담합과 경쟁의 이중구조>, 2009.11.18). 주장의 핵심은 이런 것이었다. 1) 우리 사회의 문제 가운데 하나는 과도한 경쟁에 있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하며 문제를 악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은 사회가 과잉경쟁 영역과 과소경쟁 영역으로 이중화되어 있다는 점이다. 2) 더 나아가 우리 사회에서는 과소경쟁 영역에 과잉보상과 과잉권력이, 그리고 과잉경쟁 영역에 과소보상과 과소권력이 주어지며, 전자에 대한 과잉보상은 과잉경쟁 영역에 대한 약탈에 근거하는 경우가 많다. 3) 이 때문에 우리 사회 성원들은 공적으로는 과소경쟁 영역에 대해 비판하지만, 사적으로는 과소경쟁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이차적 경쟁에 몰두하게 되는 이중적 성향이 형성된다. 

이런 주장은 우리 사회 성원이라면 모두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는 바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용어가 추상적이라면 그런 용어들을 정규직과 비정규직 혹은 교수와 시간강사 또는 '철밥통'이나 'SKY' 같은 단어로 적절히 대치하기만 하면 쉽게 이해될 것이다.  

TV에 나타난 경쟁의 두 유형

지금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런 경쟁의 이중구조가 대중문화에 투영되는 방식에 대한 것이다. 대중문화는 일반적으로 일상생활로부터 소재를 끌어내고 그렇게 함으로써 인기를 얻는다. 그렇기 때문에 경쟁사회에 경쟁을 테마로 삼는 TV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기조차 하다. 하지만 그런 프로그램을 살펴보면 이들 또한 이중적 형태를 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편에서 과소경쟁 영역으로의 진입을 위한 초과잉경쟁이 〈슈퍼스타 K〉나 〈위대한 탄생〉 혹은 〈신입사원〉 같은 프로그램을 통해서 재현되고 있다면, 다른 편에서는 과소경쟁 영역에 경쟁을 도입하는 방식을 취하는 〈나는 가수다〉 같은 프로그램이 등장하는 것이다. 경쟁의 방식도 대칭적이다. 전자는 모든 경쟁을 이겨낸 승자를 선발하고 그에게 영광을 안기는 형태를 취하지만 후자는 가장 열등한 자를 선택하여 그에게 수치를 안기는 형태를 취한다.

〈위대한 탄생〉이나 〈신입사원〉 같은 오디션 프로그램은 '멘토'를 도입하는 등 여러가지 새로운 기법을 구사하긴 해도 기본적으로 잘 알려져 있는 익숙한 패턴을 따른다. 그런 프로그램이 반복해서 제작되어온 이유는 그것이 저렴한 비용으로 괜찮은 콘텐츠를 뽑아낼 수 있는 손쉬운 방법이기 때문이다. 경쟁은 마치 정밀기계처럼 우리의 오욕칠정을 강렬한 형태로 이끌어내어 무대화하며, 또 그렇게 현현하는 생생한 감정의 결은 아주 정확하게 상응하는 감동을 시청자에게 불러일으킨다. 마치 색종이 몇장을 오려넣어 만들었을 뿐이지만 매번 다른 현란한 이미지를 연출하는 만화경처럼 작동하게 되어 있는 셈이다. 

하지만 〈나는 가수다〉 같은 프로그램의 등장은 경쟁의 이중구조라는 우리 사회의 특징에 비추어서야 제대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사회의 저류에 '철밥통'에 대한 시기심 혹은 증오심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염두에 두지 않는다면 이러한 프로그램의 출현을 설명하기 쉽지 않다. 이미 경쟁을 통과한 사람들, 뛰어나다고 인정된 사람들을 다시 경쟁에 회부하는 것은 그 자체만으로 어떤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경쟁 포맷의 탁월성과 취약성

이런 포맷은 또다른 탁월한 점을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우리는 다른 오디션 프로그램에서처럼 우리가 몰랐던 누군가가 제한된 기회와 조건에서 발휘하는 실력을 구경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 실력을 이미 알고 있는 이들이 경쟁이라는 조건이 부과될 때 어떤 변화를 이룩하는지를 보게 되는 것이다. 〈나는 가수다〉를 시청한 많은 사람들이 느낀 경쟁의 마술적인 힘은 바로 이렇게 시청자 편에서 그 변화를 목격하게 되는 설정 자체에서 발원하는 바가 크다. 

다른 한편, 경쟁에 참여한 자에게도 새로운 포맷은 강렬한 동기를 불어넣는다. 이들은 여느 오디션 프로그램처럼 낯선 경쟁자들 속에 또 하나의 낯선 경쟁자로 참여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서로 알고 서로의 실력을 알고 서로의 약점마저 안다. 무시할 수 없는 잘 아는 상대와라면, 성취에 대한 보상이 아니라 그저 "쪽팔리지 않으려는" 동기만으로도 존재를 건 인정투쟁 속으로 들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 놀라운 프로그램은 그러나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다. 경쟁을 통해 최상의 공연을 이끌어내지만, 그리하여 관객은 모두 엄청난 감동을 얻지만, 바로 그 순간 최악의 사태에 직면한다. 모두가 경쟁을 통해 더 나은 성취를 이룩함과 동시에 누군가에게 수치를 안겨야 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피할 수도 없는데, 처음부터 이 잔인함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그 메커니즘은 작동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잔인한 순간이 닥치자 이 프로그램은 난파해버렸다. 

〈나는 가수다〉가 논란에 싸인 즈음, 카이스트에서는 네번째 자살이 발생했다. 뛰어난 자들에게 부과된 징벌적 등록금 제도, 그것이 불가피하게 함께 안길 수치심, 그리고 경쟁하는 학생들 모두에게 매일 들러붙어 있는 초조감은 〈나는 가수다〉와 정확히 같은 패턴을 따르는 것이다. 하지만 이 경우 더 고통스러운 쪽은 내 보기에 카이스트 학생들이다. 〈나는 가수다〉의 출연진은 자신의 존재와 실력을 많은 사람들에게 내보일 수 있었다. 그들의 준비과정과 노력까지 조명되며, 그래서 공연 결과 매겨진 순위와 무관하게 인정을 받는다. 그리고 그것은 궁극적으로 그들의 삶에서 한편의 에피쏘드다. 하지만 카이스트 학생들에게 그만큼의 인정은 뒤따르지 않으며, 그들에게 경쟁은 삶 자체이지 에피쏘드가 아니다.

경쟁규칙을 정하는 주인의 자리

〈위대한 탄생〉과 〈나는 가수다〉가 경쟁사회의 두가지 대중문화적 표상이라면 세번째 형태로 꼽을 만한 것은 〈1박2일〉 같은 프로그램이다. 경쟁에 부심하고 경쟁의 이중구조에 시달리는 사회에서는 반(反)경쟁의 메씨지를 띤 프로그램 또한 경쟁의 가상을 취하고 등장한다. "나만 아니면 돼!"라는 대사로 경쟁사회의 잔인함을 그려내는 것처럼 여겨지기도 하는 이 프로그램은 끊임없이 출연진에게 경쟁을 강요한다. 그래서 끼니와 잠자리마저 경쟁의 대상이 된다. 

하지만 그 경쟁의 방식은 어처구니없게도 낙엽 멀리 던지기나 병뚜껑 알까기 그도 아니면 묵찌빠 같은 것이다. 그것은 경쟁이 아니라 경쟁의 정반대에 있는 제비뽑기일 뿐이다. 그들의 경쟁은 개인별이 아니라 대부분 양편으로 나뉘어 벌어진다. 그래서 경쟁의 하부단위가 협동이 되어버린다. 그날그날 패배의 결과는 참혹하게도 밥을 굶은 것이거나 야외취침이거나 얼음물에 뛰어드는 것이지만 같은 출연진이 회를 거듭하며 게임을 진행하기 때문에 사실상 경쟁은 호선(互選)으로 귀결된다. 더구나 이 모든 어처구니없고 무의미한 경쟁을 설정한 제작진마저 그 경쟁 속으로 이끌려 들어온다. 

이 프로그램이 경쟁을 조롱하지만 경쟁하고 있는 척하고 있는 모습은 경쟁 이데올로기가 가진 힘을 보여준다. 하지만 이 구강기를 못 벗어난 듯한 '어른 스머프'들의 한심한 가짜 경쟁의 행진이 오랜 시간 대중의 사랑을 받아온 것은 거기에 어떤 유토피아적 계기가 숨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예컨대 〈1박2일〉에서는 출연진이 어처구니없는 미션을 설계한 제작진과 끊임없이 그 과제와 수행방법에 대해 협상을 벌인다. 때로는 그런 경쟁을 설계하고 강요하는 제작진을 그 경쟁 속으로 끌어들인다. 그리하여 그들은 경쟁에 복종하지만 또한 경쟁규칙을 설계하는 주인이 되기도 한다. 

내 보기에 그것이 우리 사회 성원이 찾아야 할 위치이다. 한편으로 경쟁의 이중구조를 깨뜨리고 다른 한편으로 무엇에 대해 어느 정도나 경쟁할지를 정하는 주인의 자리 말이다.

2011.4.20 ⓒ 창비주간논평




김종엽
 / 한신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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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주 대입수학능력시험이 끝났다. 우리 사회가 '경쟁사회'라고 하지만 수능시험만큼 경쟁적인 것이 또 있을까? 전국의 거의 모든 고등학생들이 한날한시에 시험을 치르고, 한 문제 더 맞고 틀리고에 따라 갈 수 있는 대학들이 거침없이 바뀐다. 그러니 신종플루 탓에 여느 해보다 더 긴장된 시간을 보낸 수험생들과 더불어 우리 사회의 논쟁의 핵심 축 가운데 하나인 시장 혹은 경쟁 메커니즘 문제에 대해 생각해보는 것도 의미있을 법하다.
  
우리 사회의 한쪽에는 경쟁 메커니즘만이 생산성과 효율성을 증대시킬 수 있는 방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경쟁이 별로 없는 사회영역이 눈에 띄면 어디에나 경쟁을 도입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물론 스스로를 그런 경쟁 속에 집어넣으려는 생각은 없으니, 그런 의미에선 이들은 위선적이거나 악당이다. 다른 편에는 경쟁이 도입되는 경우에는 어디서나 신자유주의의 냄새를 맡으며 단연코 투쟁할 것을 주창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위선적이지 않고 도덕적일 경우도 많지만, 왜 경쟁 도입이 대중에게 설득력을 갖는지 잘 이해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아둔하다.  
경쟁과잉과 경쟁과소의 이중구조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성향과도 연계되어 있을 경쟁 애호나 경쟁 혐오 같은 성향과 거리를 둘 필요가 있다. 이 성향이 정보 수집을 왜곡함으로써 도처에서 경쟁의 과잉이나 과소만 보이게 하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 우리 사회의 핵심문제는 경쟁의 과잉이나 과소가 아니라 과잉과 과소의 병존 또는 경쟁의 이중구조에 있다. 

재벌기업은 과소경쟁 속에 있지만 중소기업은 과잉경쟁 속에 있고, 대학교수는 과소경쟁 속에서 살지만 시간강사는 과잉경쟁 속에 있다. 공무원이나 공사의 직원들은 과소경쟁 속에 살지만 공무원 임용고시 준비자는 과잉경쟁 속에 있으며, 자동차 회사의 정규직은 과소경쟁 속에 있지만 비정규직은 과잉경쟁 속에 있다. 교사는 과소경쟁 속에 있지만 기간제 교사나 교원임용고시생은 과잉경쟁 속에 있다. 이런 대조가 무척이나 길게 열거될 수 있음을 우리 사회 성원들은 잘 알고 있다. 

더 고약한 것은 경쟁과소가 과잉보상과 과잉권력에 그리고 경쟁과잉이 과소보상과 과소권력에 연계되어 있으며, 전자의 과잉보상은 상당정도 과잉경쟁 영역에 대한 약탈에 근거한다는 점이다. 수능시험을 치르는 학생들을 비롯하여 각종 고시나 취업에서 경쟁이 극심한 것은 경쟁의 이중구조 또는 과잉경쟁-과소경쟁의 공존 사이의 약탈적 관계 때문이다. 과소경쟁 영역으로 진입하기 위한 2차적 경쟁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 2차적 경쟁은 가족의 미래를 건 투자이기에 더 치열할 수밖에 없다.

경쟁을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담합
   
이런 경쟁의 이중구조 속에서 과잉경쟁 속에 있는 다수 대중은 어떤 생각을 할까? 당연히 과소경쟁 영역의 진입장벽이 낮아져야 하고 과소경쟁 영역 자체에 경쟁 메커니즘이 들어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럴 때 자신이 과소경쟁 영역의 지대 추구자들에 의해서 덜 착취당할 수 있다고 생각하며, 시장에서 더 값싸고 질좋은 재화와 써비스를 구매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진입장벽의 완화와 경쟁 메커니즘의 도입이라는 대중의 요구에 대해 상류층 혹은 보수 세력들은 늘 자신을 제외한 그 아래 부분에 대해 경쟁 도입을 주장하는 동시에 자신의 영역은 자율과 자유의 이름으로 보호하고자 한다. 다른 한편 진보진영은 공공성이나 반신자유주의를 내걸고 경쟁 메커니즘의 도입을 한사코 반대한다. 하지만 대중은 그 둘 사이에서 보이지 않는 유착을 감지하고 있다. 

사회적 연대감과 공정한 경쟁규칙을

지난 10여년에 걸친 비정규직화를 생각해보라. 기업주들은 노동자들의 비효율성을 말하며 경쟁과 시장 메커니즘 도입을 주장했다. 그렇게 함으로써 자신들에 대한 개혁의제를 비껴가는 동시에 도전집단을 개혁대상으로 몰아넣었다. 이런 공격에 대해 조직된 노동자들은 경쟁과 시장 메커니즘의 도입에 대한 반대를 반신자유주의라는 명분 속에 결집했고, 그 결과 조직된 노동자를 우회하는 비정규직화가 폭증했다. 이 패턴은 대기업과 대기업의 조직노동자들 사이에 한정되지 않고 사회의 여러 영역에서 유사한 패턴으로 반복되었다. 이런 패턴을 거치며 과잉경쟁에 내몰린 사람들의 시선에 들어오는 것은 보수와 진보 간의 유착에 다름 아니다.
 
우리 사회에서 정말 필요한 것은 경쟁에 의한 효율성이나 반신자유주의가 아니라, 전체 사회의 경쟁강도를 완화하는 동시에 경쟁의 이중구조를 혁파하는 공정한 경쟁규칙을 도입할 정치적 전망을 여는 것이다. 전자가 사회적 연대감에 기초한 것이라면, 후자는 공정과 정의에 연결된 것이다. 연대와 공정이 내적으로 연결된 정치적 전망에 의해서만 반신자유주의와 경쟁지상주의의 맹목적 대립이라는 협곡을 벗어날 수 있으며, 어디에 경쟁을 도입하고 어떤 경쟁을 완화해야 하는지를 가리는 지혜로움에 이를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수능시험도 덜 고통스러워질 것이고 수능과는 전혀 다른 선발방식을 구상할 수도 있을 것이다.

2009.11.18 ⓒ 김종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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