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월 12일 모임
2011.07.12 21:14
세미나 중에 약간의 메모를 남깁니다.
(그랬다가 오늘 다시 내용을 채워 갑니다. 그 사이에 읽으신 분들은 과거의 판본을 기억 못하실지도.. ^^ )
참석: 시인처럼, 박인구, 해피쏭, 자연
장소: 이음책방에서 행사가 있어서 시인처럼님 사무실로 서둘러 옮김
발표: 박인구님
내용: 지난 번에 이어서 맨드비랑의 문제의식에 대한 공유
곧장 맨드비랑을 얘기하기에 앞서서 맨드비랑에 관심을 갖는 전반적인 아니 근본적인 배경이 먼저 논의되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문제의식은 근대물리학 이후에 지금까지도 사유의 근간을 형성하고 있는 인식대상과 인식주체의 이분법, 결국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박인구님은 관찰하는 존재와 관찰되는 대상을 갈라놓는 근대적 관념과 그에 따른 주체의 문제가 불만이라는 것이었죠.
하지만 제가 인식론적 논의와 존재론적 논의를 섞는 것의 문제점을 지적했습니다. 인식론의 문제라면 그것이 어떤 것이든 인식주체와 인식대상을 (잠정적으로라도) 구별하고 이 사이의 관계를 얘기하는 것은 불가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존재론적 논의에서 대상과 주체의 관계를 일원론으로 볼 것인지 이원론으로 볼 것인지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식론적 논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결국 칸트의 틀이 문제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지만, 칸트의 모든 거대한 산을 다 헤매며 다닐 수는 없기에 해결할 수 있는, 또는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에 집중하자고 했습니다.
저는 이 대목에서 공간연구를 중시 여기는 지리학자/사회학자 데이비드 하비가 떠올랐습니다.
http://en.wikipedia.org/wiki/David_Harvey_(geographer)
데이비드 하비가 강하게 의존하는 사람은 프랑스의 사상가 앙리 르페브르입니다. 르페브르는 '공간의 생산'이란 제목의 저서에서 세상을 '공간'이란 개념을 통해 철저하게 그리고 근본적으로 다시 볼 것을 제안하고 있습니다.
르페브르와 하비의 공간적 전회(spatial turn)을 간략하게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근대과학 내지 수학이 만들어낸 추상적이고 기하학적인 도시계획가의 공간(espace conc_u, conceived space) 대신 실제 삶 속에서 직접 겪어내는 체험의 공간(espace vecu, lived space) 즉 예술가의 공간을 창출하자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르페브르의 공간분석은 매우 심오하면서도 많은 내용을 가진 것이어서 간단하게 몇 마디 거들고 갈 문제는 아닙니다만, 박인구님의 문제의식이 르페브르의 고민과 잘 통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아가 그것을 경제의 문제, 정치의 문제와 직접 연결시키려 한다는 점에서 데이비드 하비의 논의가 매우 적절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제 세미나에서는 얘기하지 않았지만 말이죠.)
자연스럽게 박인구님이 자주 인용하는 칼 폴라니가 다시 등장했습니다.
칼 폴라니(http://en.wikipedia.org/wiki/Karl_Polanyi )
군도의 경제와 시장 경제
이 대목은 요즘 소위 '선물의 경제'(economy of gift)라는 이름으로 자주 얘기되는 문제와 연결될 것 같습니다.
칼 폴라니의 저서 '거대한 변혁, 우리 시대의 정치적 및 경제적 기원'
The Great Transformation: The Political and Economic Origins of Our Time
의 내용이 거론되었는데, 나중에 시간이 더 있을 때 다시 더 적어볼까 합니다. 박인구님이 거들어주시면 더 좋구요.
독일 출신의 미국 사회학자 프리츠 파펜하임이 쓴 '현대인의 소외'에 대한 얘기도 좀 길게 얘기되었습니다. 파펜하임은 칼 마르크스와 퇴니스의 이론을 근간으로 삼아 현실 속의 소외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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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 ‘내가 컵을 집는다.’는 행위
저기 탁자 위에 있는 물 컵을 집자마자 나는 ‘나’와 ‘세계’를 찾았다. 왜냐하면 탁자 위에 그 ‘무언가가’ 어슴푸레 존재하는 것을 처음 알았을 때, 그 ‘무언가’와 ‘나’는 서로가 서로를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혼미한 경계를 공유했다. 하지만 내가 안경을 쓰고 그 탁자위에 있는 것이 컵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그리고 손을 뻗어 그 손잡이를 돌리며 집게손가락에 힘을 주어 그것을 들어 올렸을 때, 나는 이 과정이 ‘무엇’에 의해 인도되었는지 전혀 이해하지 못하지만 그 과정을 이미 ‘완수’했음을 발견한다. 그러나 이 완수는 아직 어떤 ‘의미’도 없다. 이 ‘의미’는 다른 영역에서 넓게 뻗어나가는데, 그것은 이 컵을 들고 있음으로써 내가 컵을 들기 전의 ‘나’와는 다르며, 이 컵과도 구분되는 존재라는 인지의 영역에서 ‘의미’는 최초의 활동을 시작하는 것이다. 내가 컵을 들기 전의 ‘나’와는 다르다는 인식, 그리고 이 컵과도 ‘나’는 다른 존재라는 인식, 이 두 가지는 축복받은 인식이다. 왜냐하면 원초적이었던 ‘언어적’ 나와는 달리 이 새로운 집으로 이사 온, 즉 자아와 외부세계라는 새로운 공간으로 이사 온 ‘나’는 비로소 원초적 ‘나’가 되려고 꿈꾸었던 그 존재가 이미 되었음을 기분 좋게 음미하고 있기 때문이다. 원초적 ‘나’는 언어에 둘러싸인 이데올로기적 ‘나’에 불과했다. 그러나 이 새로운 ‘나’는 ‘자아’라는 공간 안에서 편안한 쉼을 얻고 있고, ‘외부세계’라는 넉넉한 공원도 지니고 있다. 이것이 바로 탁자 위에 있는 물 컵을 집자마자, ‘나’와 ‘세계’를 찾았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이다. 그러므로 신체를 통해 자아감의 생생한 통각을 흠뻑 만끽했던 비랑은 ‘노력’의 철학자로 불리는 것이 정당하다. 왜냐하면 그의 이 섬세한 감각의 출발은 바로 ‘의지’를 그저 하나의 ‘활력’으로 보지 않고 신비감 가득 찬 비가역적 활동으로 생각한데서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 ‘노력’을 통해 ‘신체’는 신체 이상의 믿을 수 없는 영역을 계시했다. 그리고 이것이 비랑을 노력의 철학자로 부르게 된 연유가 되었다. 나는 원한다. 그러므로 존재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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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서 '비가역적인 시간'의 문제가 진지하게 이야기 되었습니다. 해피쏭님은 원래 시간은 가역적인 것이 아닌가 지적하셨고, 제가 시간이 가역적이라고 보는 것 자체가 근대과학의 산물이고, 맨드비랑과 그의 계보를 잇는 앙리 베르그송은 비가역성에 주목하면서 시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놓았다는 이야기를 했습니다.
제가 해피쏭님의 의견을 잘못 이해했습니다. ^^ 아래 댓글을 보시면 더 상세하게 아실 수 있죠.
그런데 갑자기 '비가역적인 시간'이 문제가 된 맥락이 좀 아리송하실 것 같습니다. 위에서 인용한 박인구님의 발제문에서 "컵을 들기 전의 나와 컵을 들고 난 후의 나는 다르다"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비가역적(irreversible)의 문제는 아닙니다. 어떤 종류의 선택을 하는 것이고, 그 선택이 일어난 뒤는 그 전과 다르다는 의미가 됩니다. 오히려 선택에서의 분지가 돌이킬 수 없다는 의미이므로, 단선적인 선분으로 표상되는 시간에서 방향을 반대로 바꾸는 정도의 수준이 아닌 것이죠.
깨진 컵을 집은 뒤와 그 이전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다.
가역성의 폭력성? 자본주의의 폭력성?
펀드매니저의 고통
전쟁을 통해 채권과 신용이 만들어지는 과정
주체와 객체의 이분법이라는 물리학적 이데올로기
전체적인 논의의 맥락에 대해 시인처럼님의 심각한 문제제기가 있었습니다.
"내가 좋아하는 것과 내가 맞서는 문제를 구별해야 한다. 내가 좋아하는 것이 곧 내가 맞서는 문제라고 생각해 버리게 되면 맞서는 문제를 제대로 진단하지 못하게 된다."
메타적인 언급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내가 관심을 가지고 좋아하면서 하는 것과 내가 해결하려고 하는 문제가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다는 지적이었고, 이 둘을 구별하지 않는다면 상당한 오류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라 할 수 있겠습니다.
학문정신: 함부로 얘기하지 않는다.... 한 가지를 말하기 위해 스스로와 남들을 설득하기 위한 열 가지 백 가지를 찾아내는 것.
삶과 유리되지 않은 학문
일단 여기까지만 써 봅니다.
댓글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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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구
2011.07.13 23: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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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쏭
2011.07.14 03:09
좀 오해가 있지 않았나 해서 적어봅니다.
저는 시간의 비가역성이 자연스러운 것이고 오히려 시간의 가역성이 사고의 추상을 통해 일어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박인구님이 시간의 비가역성이 비로소 발견된 것처럼 과장되게 표현한 것을 이해할 수 없다는 의미로 말했어요.
오히려 우리의 의식 속에서 (추상적 수학적 사고를 통해서이든 단순히 과거를 기억하고 미래를 기획하는 통상의 사고활동을 통해서이든 )
시간이 가역성을 띄는 점이 오히려 주목이 되는 점이고
신비라면 신비이고 시간의 개념을 근본적으로 바꾼 것이라는 말을 들을 만하다고 생각하거든요.
그날 공부모임을 정리한다면
일단 박인구님이 회피하지 않고 자신의 입장을 끝까지 말해주었던 점이 훌륭했다고 생각합니다.
어지간히 논쟁을 좋아하지 않고서는 힘들듯......
저라면 그렇게까지 끌고 가지 못했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군요.
시간의 가역성에 대해 생각해본 적은 없지만
특히 자본주의에 대해 가역성의 폭력이라는 관점은 처음 듣는 것이라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생각해보았습니다.
돈이 돈을 낳는다.
돈놓고 돈먹기(?)
뭐 이런 일이 당연한 듯이 일어나는 것과 관련이 있는것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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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인구
2011.07.14 15:38
가역과 비가역에 관한 대비는 참 좋은 아이디어인 것 같습니다.
어떤 연관을 확실하게 증명하기 어렵지만, 가역은 비가역을 일정부분 동반하고 있고, 비가역도 가역의 추정의 빌미를
제공하는 것 같습니다.
이거 정말 재미있는 포착인거 같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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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1.07.16 01:06
해피쏭님의 생각을 오해하게 해서 죄송합니다.
그런데 시간의 비가역성에 주목하는 것은 어떤 면에서 19세기의 산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헤라클레이토스나 동아시아의 사유전통이 있긴 하지만, 언제나 시간의 비가역성은 영원이라는 이름 아래 무시되더 왔던 것 같습니다. 특히 근대과학의 성공적인 안착 이후 시간의 비가역성은 거의 도외시되지 않았나 싶습니다. 자연과학의 전통에서는 이른바 열역학 둘째 법칙을 통해서 시간의 비가역성이 비로소 문제가 되기 시작했고, 제 지식 안에서는 베르그송 이전까지는 시간의 비가역성을 본격적인 철학의 주제로 삼은 사람도 별로 없었습니다.
맨드비랑(1766-1824)이 그런 점에서 선구자가 되겠네요. 맨드비랑을 왠지 19세기 사람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칸트(1724-1804)보다는 나중이지만, 19세기 초이니 베르그송과의 직접적인 연관은 약할 것 같습니다.
(프랑스어판 위키피디어 http://fr.wikipedia.org/wiki/Maine_de_Biran 를 보면,
Su-Young Hwang, L'Habitude dans le spiritualisme français : Maine de Biran, Ravaisson, Bergson, Lille, 1996.
라는 저작이 나오는데. 이 책의 저자는 바로 황수영 선생님이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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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1.07.16 01:17
조금 찾아보니 1914년에 이미 맨드비랑과 베르그송의 연관에 대해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there is a close kinship between the philosophy of de Biran and that of Bergson - a kinship of the spirit rather than the letter, no doubt, but still considerable enough to ensure that the study of the one will throw light on the study of the other." (Arthur Robinso (1914-5). "The Philosophy of Maine de Biran: The Way out of Sensationalism" Proceedings of the Aristotelian Society, Vol. 15, pp. 252-270 )
직접적인 연결은 없지만, 정신이나 계보면에서는 가깝다고 말하고 있는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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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1.07.16 01:23
참.. 다음 모임은 8월 16일 정도로 잡아 두었습니다. 휴가철이기도 하니 방학을 하는 셈입니다. ^^
아마 다음 모임에는 해피쏭님이 "생명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발표를 해 주실 것 같습니다. 제가 좀비 논변에 대해 얘기할 기회도 조금 주시면 살짝 곁들여 볼까도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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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1.07.16 01:25
하나 더 있습니다... 온생명론 작은 토론회는 날짜와 주제를 확정짓지는 못했지만, "온생명론 연구를 위한 커리큘럼"을 만들어 보자는 의견이 있어서 흥미롭게 얘기가 되었습니다. 온생명론을 공부하려고 할 때 무엇을 어떻게 읽어나가야 할지 공부안을 만들자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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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1.07.30 16:26
아주아주 죄송스럽게도... 16일에 제 직장에서 행사가 잡혔습니다. 방학 중이지만 구성원 전체가 참여하는 1박2일 워크숍이라 빠지기는 힘들 것 같습니다. 16일이 안 된다면 언제쯤 모이는 게 좋을까요? "온생명론을 공부하기 위한 커리큘럼"에 대해 얘기해 보는 것도 좋겠다 싶습니다. 여하튼 13일에 모여 의논해 보기로 하죠. ^^ 번번히 죄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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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1.08.06 22:21
다음 모임 어떻게 되는 건가요? ^^ 아무도 답글이 없어서... 궁금해졌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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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ppysong
2011.08.06 22:54
13일에 모여서 의논해야죠?
당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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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1.08.06 23:15
ㅋㅋ 댓글 달아주셔서 고맙습니다, happysong님! 언제부터인가 저만 댓글을 달고 있어서 노파심에 혹시 안 읽고 계신가 싶어서... '궁금증'이 생긴 모양입니다.
이 곳에는 태풍의 영향 때문인지 바람이 많이 불고 있어서 그 동안의 더위가 한풀 물러가는 것 같기도 합니다. ^^
근데 검은 고양이와 흰 토끼인가요? ^^
(아주 오래된 영상인데, 검은 고양이 노래의 원곡이 있답니다. Volevo un gatto nero (나는 검은 고양이를 원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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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쏭
2011.08.08 21:23
참 재미있네요.
방청석에 아네트 (말광량이 삐삐 친구) 아닌가요? ??
힘찬 어린이가 참 좋습니다.
저희 딸이 몇년전만해도
쌈바춤을 곧잘 추곤 하더니만
요즘 안 춰서 좀 섭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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自硏 自然
2011.08.08 23:38
검은 고양이... 귀엽죠. 위에 링크 걸어둔 영상은 1969년 이탈리아 볼로냐에서 열린 "제키오 도로"(황금동전)이라는 제목의 국제적인 어린이 노래대회입니다. 국제라고는 했지만, 대부분 이탈리아였던 모양입니다. 거기 출품된 노래가 한국에 번안되어 어릴 적에 참 많이 들었습니다. 집에 LP판이 있었지요. 제 블로그에 가사 올려 놓은 게 있습니다. ^^ (http://zyghim.egloos.com/3916599 )
정말 기억력이 좋으십니다. ^^ 숙취로 인해 기억이 가물가물한데..ㅋㅋ 다시 번쩍 생각이 드네요.
이 내용만으로도 글을 한번 정리해 보는게 의미있을거 같네요.
온생명 공부모임 방학했으니까.. 그 사이에 한번 이 내용을 가지고 정리해 볼까 유혹이 듭니다...(요즘 신용관리사라는 자격증 공부를 하고 있어서, 시험공부에 매진을 해야하는데, 다른 곳에 유혹이 되네요..)
그리고, 잠깐 뒤풀이에서 얘기가 나온 것이지만, 한스 제들마이어라는 사람의 '중심의 상실'이라는 책도
르페브르라는 분의 생각과 연결점을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이 들었습니다.
통상적인 미술사를 열거하는 책이 아니라, 예술을 바라보는 인식의 역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입니다.^^